tvn 2012년 제작, 연출 : 이정효·장영우, 극본 : 정현정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보면 가끔 영화나 드라마 자체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행복감을 느낄 때가 있다.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2 는 바로 그런 드라마다. 첫 시퀀스. 주열매와 윤석현의 19금(?)적 섹스로 시작된다. 알고보니 이는 윤석현의 작품 속 장면을 상상으로 구현한 것이었지만, 앞으로 이 드라마가 남녀관계에 대하여 매우 솔직하며 생기발랄하게 이야기를 전개하겠다는 일종의 의도된 선언처럼 보인다.
주열매(정유미)는 33세 음악감독이다. 미숙하고 열정에 들떴던 20대를 지나 어느 정도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경험했다. 음악감독으로서 나름 확신을 갖고 있고 일에 있어서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런데 일상은 아직도 철없는 철부지 소녀같다. 갈팡질팡하면서 울고,웃고,화내고를 반복한다. 열매를 키워준 할머니의 결혼 독촉에 시달리고 30대 중반을 향하는 지금 현실적으로 결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윤석현(이진욱)은 열매보다 한 살 많은 34세 시나리오 작가이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데뷔에 성공하여 나름 자리를 잡았다. 잘생긴 외모에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자상하다. 정말 완벽한 남자다. 그러나 자기 만의 영역이 확실하고 누구에게도 그 영역 너머 자리를 내주려고 하지 않는다.
주열매는 윤석현을 사랑한다. 운명이라고 믿었고 믿어 왔고 믿고 싶다. 친구였던 엄마들이 이웃으로 집을 짓고 일종의 공동체로서 살게 되면서 주열매와 윤석현은 함께 자랐다. 주열매에게 윤석현은 가족이면서 연인이고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존재이다. 적어도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빠가 없었던(열매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 내내, 엄마가 돌아가시고(열매가 고3 때 돌아가신다.) 세상에 혼자 남겨졌을 때에도 열매 곁에는 그 남자 윤석현이 있었다. 첫키스의 남자도 바로 그 남자 윤석현이었다. 키스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며 달려들었던 윤석현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요구하는 열매는 처음부터 한 남자 윤석현만 바라보았다. 석현을 두고는 20대의 풋풋한 강나현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는다. 주열매는 석현에게 말한다. 난 너를 사랑하고 너와 결혼해서 인생 끝까지 가고 싶다고.
그런데 윤석현은 주열매를 밀어낸다. 몇번의 연애(그들은 다섯 번 연애하고 헤어진다. 마지막은...)에서 한없이 다정하게 열매를 아껴주다가도 주열매가 한 걸음 내딛어 결혼을 말할 때마다 석현은 열매를 밀어낸다. 카페에 4시간이 넘도록 열매를 그냥 앉혀두고 자신은 맞은 편에 앉아서 시나리오 작품에 몰입하면서도 설명이 없다. 미안해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음으로는 늘 열매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저 열매가 곁에 있기를 바랄 뿐이다. 드라마는 후반부까지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도대체 윤석현이 주열매를 밀어내는 이유에 대하여 말해주지 않는다. 분명 윤석현이 주열매를 사랑하는 것은 맞는 것 같은데 이해할 수 없다. 동그라미 안에 홀로 남겨지기를 원하는, 그 안으로 열매를 허락하지 않는 석현을 열매는 떠난다. 그런데 신지훈의 등장으로 철옹성 같이 지탱해 온 그의 벽이 무너진다.
신지훈(김지석)은 우연히 스치는 인연으로 운명처럼 열매를 만난다. 주열매보다 1살 반 정도 연하이고 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산을 자산으로 카페를 운영한다. 기타를 배우면서 교습생일 때 기타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주열매를 만난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커피를 좋아하게 되어 이디오피아까지 갔다가 길을 잃었는데, 지쳐서 포기하고 싶을 때, 기타를 배우다가 손가락이 아프다고 그만두지 말라는 조금만 더 연습하다 보면 굳은살이 박히면서 기타를 잘 칠 수 있게 된다는 열매의 말, '조금만 더'를 기억하고는 결국 계속 걸어서 길을 찾아 살았다. 그 후 열매를 만나고 싶어했는데 우연히 몇 번에 걸쳐 열매를 만나게 된다(그들은 여러 차례 우연히 만나는데 그에 관한 에피소드가 귀엽다). 신지훈은 엄마가 떠나고 아버지 홀로 지훈을 키우다가 보육원에 맡겨져 성장했는데, 그 시절 보육원 마당에 있던 나무를 통해 사랑에 대한 관념을 정립한다. 착한 심성으로 자신을 버린 엄마도 원망하지 않는다. 어린 지훈은 나무가 죽을까봐 자다가도 한 밤 중에 물을 떠서 나무에 주고는 했는데, 그 때 '사랑이란 늘 걱정되고, 뭔가 해 주고 싶고, 해주고 나면 뿌듯한 거'라는 생각을 했다고. 열매에게 자신의 사랑에 대한 관념을 말한다. 석현이 성질더럽다고 한 열매를 '순둥이'라 부르고 열매의 일상 자체를 보듬어 아낌없는 사랑을 구현한다. 지훈은 종종 운명적인 사랑에 관하여 영화 첨밀밀을 얘기하는데 등려군의 노래 월량대표아적심은 그들 만남의 주요한 테마가 된다. 열매와 결혼을 약속하게 되자, 어린시절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를 찾아가 해후한다. 열매는 신지훈을 통하여 사랑을 통한 성장을 경험한다.
이들 세 사람의 결말이 궁금하다면 이 드라마를 찾아서 보는 것이 좋겠다.^^
주열매의 사랑스러움과 까탈스러움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기한 정유미는 정말 주열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캐릭터를 완성한다. 이진욱과 김지석은 그냥 잘생긴 배우가 아닌 로맨틱 코미디의 남주로서 확실한 개성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묘미는 바로 열매의 친구들이다. 학창시절 나름 문제아(?)로 뭉친 우주선, 우지희·주열매·선재경 세 친구들은 30대에 이르기까지 일과 연애, 인생의 희노애락을 공유한다.
불쌍한 여자가 되느니 나쁜 여자가 되겠다는 재경(김지우)은 모델에서 구두 디자이너로 전업하면서 유명 아나운서 이장우(정말 나쁜놈이다)와 정략적으로 결혼하지만 사랑이 아닌 계산적 부부관계는 오래 가지 못한다. 이혼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선다. 늘 곁을 지키며 오직 재경의 진심 하나만을 원했던 남자 한정민(동상이몽의 소이현의 그 남자 인교진이 연기)을 사랑하지만 그에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갈등을 겪게 된다. 사업적 성공을 이루게 되지만 한정민 없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로소 한정민에게 정착한다.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셋째 딸로서 스스로 열등감에 시달리는 우지희(김예솔)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조건을 갖춘 의사를 남편감으로 선택하지만 사랑이 아닌 조건으로서 시작한 관계 역시 오래가지 못한다. 세 친구 중 가장 여리고 고지식하면서도 연애에 있어서는 낭만적인 로맨틱함을 꿈꾼다. 영화관 부 매니저로서 책임을 다하는 다부진 직업인으로서의 면모도 있다. 결국 동종업계의 평범한 그러나 아픈 과거를 통하여 소탈하지만 진실한 사람과 조금은 시끄러운 진짜 연애를 하게 된다.
각자 다른 인생관과 연애관을 가진 세 친구들이 좌충우돌 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에피소드마다 배우들의 통통 튀는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세 친구들의 바바리맨 에피소드나 셋이 함께 점을 치는 에피소드는 정말이지 배꼽을 잡게 한다.
한 사람 더 빼 놓을 수 없는데, 바로 25세 시나리오 작가 강나현이다. 자신의 작품을 순수창작물이라 자부하였는데 이를 상업적으로 수정하였다며 윤석현에게 대놓고 따지다가 석현의 공동집필 제안을 수락하고 주열매·윤석현의 집에서 함께 생활한다. 석현을 두고 미묘한 삼각관계를 이루는데, 열매가 신지훈에게로 떠난 이후 석현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석현의 열매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을 확인한다. 그 후에도 우정으로서 그의 곁을 든든히 끝까지 지켜주는데, 20대의 풋풋하면서도 싱싱한 모습이 참신하다. 때로 어른같은 모습을 보일 때도 있는 괜찮은 친구다.
열매와 석현의 집, 지훈의 집과 카페, 재경의 구두회사 사무실, 지희의 집과 근무하는 극장 등 공간으로 이동하는데, 주 무대인 열매와 석현의 집은 두 사람의 알콩달콩 사랑처럼 아기자기하다. 열매와 석현, 지훈과 열매 사이 러브스토리의 변곡점마다 깔리는 배경음악도 매우 멋지고, 드라마 속 열매가 음악감독인 만큼 음악적으로 의미 있는 음악이나 인디 밴드들의 연주도 들을 수 있다. 기록하고픈 멋진 대사들도 가득하다.
등장인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개성에 충실하면서도 그들 각자의 감정이나 생활방식에 이유와 명분이 있어 설득력 있는 줄거리를 갖추고, 여기에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 미학적으로 나름의 완성도를 갖춘 미장센, 장면마다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으로 구성된 작품. 그런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멋진 경험이 된다.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2는 그런 멋진 경험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동시대의 같은 연배의 친구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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