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or 맛집

[스크랩] (알 럽 트래블 / 조지아) 트빌리시는 아찔한 유혹이다.

조앤디디온 2019. 1. 14. 01:47

 

 

 

 

 

 

 

 

 

 

 

 

 

 

 

 

 

 

 

 

  유령호텔을 나와 여행자 거리로 방향을 잡는다.

  새벽 산책과 더불어 트빌리시 도심을 오랫만에 제대로 한번 걸어보기 위해서였다.

  더할나위 없이 맑고 쾌청한 날씨다.  새벽 산책길의 바람은  떠나올 때 한국에서 처럼 아주 약간 가을냄새가 났다.  바람의 온기가 어제와 다르다.

  매시간마다 울려대는 금방 허물어질것 같은 시계탑에게 오늘아침  첫인사를 건넨다.

  '감마르 조밧 타임워치.'

  '감마르 조밧 트래블러.'

  오늘도 이른 시간탓인지 빵을 사들고 집으로 가는 할머니를 제외하고는  여행자 거리에 아무도 없다.

  신학대학이 들어서 있는 '즈바리 마마 성당(Jvaris Mama Church)'과  니노 할머니 포도나무 십자가를 보관하고 있는 '시오니 성당(Sioni Cathedral)' 사이의 골목을 지나가며 아주 잠시 멈춰서서 기도를 드린다.  비록 아주 오래전부터 돌팔이 기독교인으로 전락해버린 처지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내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늘 생각한다.

  이곳에 오면 늘 어떤 가슴 뿌듯한 푸근함이 있다. 

  이곳에는 '조지아 정교회 성당'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지역 안에  '유대교 기도사원 시나고그'와 '카톨릭 성당',  거기에다 '이슬람 모스크'까지 버젓이 놓여있다.  종교간의 대립이나 마찰이 없다.  조지아 정교회는 타 종교의 신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한다.  소수 종교인 유대교. 카톨릭. 심지어 이슬람교 이지만  그곳의 신자들은 또 자신들의 신앙에 따라 자유롭게 종교활동을 하면서,  조지아 인구의 95% 정도가 '조지아 정교회'이면서도 자신들의 신앙에 배려를 해주는 것에 감사해 하고있다.  사랑이며 배려이자 공존이다.

  그런 특별한 지역에  세계 각국에서 저마다 다 다른 신앙을 가진 여행자들이 모여들어 서로간의 온정을 나눈다.  이곳은 모든 인류가 모여서 화합과 평화를 노래하는 자유 공간이다.  평화 지대이다.

 

  여행자 거리를 빠져나와 '고르가살리 광장'에 도착하면  왼편 강 건너로 메테히 교회와 트빌리시를 건설한 '바르탕 고르가살리 왕'의 동상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고개들 돌려보면 남쪽으로 우뚝솟아 트빌리시의 올드타운을 감싸고 있는 성산 '므타츠민다 산'이 내려자 보고 있다.  이 산의 본래 이름은 '다윗 산'이었다.  아제르바이젠과의 국경에 있는 '데이빗 가레자 수도원'의 그  '데이빗'과 여기 다윗산의 '다윗'은 같은 사람이다.  그는 사실 이곳 조지아 사람이 아니다.  그는 터키의 카파토키아 사람이다.  6세기에  수도사 다윗(데이비드)을 포함한 13명의 수도사들이 이곳 이베리아 왕국(조지아)로 왔다.  그들은 흩어져서 선교활동을 벌였는데,  다윗(데이비드)이 이곳 므타츠민다 산의 꼭대기에 동굴을 파고 기거를 했었다고 한다.  그 동굴의 자리에 교회가 지어졌으니  '나리칼라 요새(Narikala)' 안에 있는 '다윗 성당' 이다.

  트빌리시의 랜드마크는 공식 싸이트에서 '사메바 대성당(Sameba Church)' 이라고 하지만,  모든 여행 팜플렛이나 책자들에는  나리칼라 성채가 올려다 보이는  올드 트빌리시의 전경을  랜드마크로  즐겨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서 포플러 나무 우거진 멋진 골목을 따라 가다보면 '유대 시나고그'가 모습을 드러낸다.

  야외 노천 카페에서 정리와 청소를 하면서 이제 하루 장사를 시작하는 모습을 바라보다 '감마르 조밧'하고 인사를 나눈 후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 기다렸다가 모닝 커피를 한잔 하고 갈까?'  하는 아쉬움으로 뒤돌아보니  점원이 카페에서 나와 인도와 차도까지 빗자루질을 하고 있다.  영업 준비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걸려야 하는 모양이다. 

  싱그럽고 아름다운 조용한 엣 도심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렇게 그렇게 한참을 걸다보면 높은 건물들 지붕위로 눈부신 황금빛 아침햇살이 비춰지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너른 광장이 나타난다.

  조용하기만 하던 도심에 갑자기 수많은 차량들이 바쁘게 오가기 시작한다.

  트빌리시 여행의 핫플레이스 이자 올드 타운의 핵심인  '자유 광장(Liberty  Sq)'이다.  이곳의 풍광은 가히 '리틀 파리'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광장의 중앙으로 거대한 자유탑이 높이 솟아올라 있고,  독립 이전까지  레닌 동상이 서 있던 자리엔 지금  '성 조지(St. Georgius)'의 황금 동상이 우뚝 서서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다.

  여기의 이 '성 조지' 가 바로 '조지아의 수호성인'이다.  니노 할머니가 아니다.  '성 그레고리우스'  또한 같은 '성 조지'의 다른 이름이다.  '데이비드'가 '다윗'이듯이 영어식 표현.  러시아식 표현.  라티어식 표현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발음되어지고 문자로 쓰여지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조지아의 수호성인'인 '성 조지' 또한 조지아가 아닌 카파토키아 사람이다.  '니노 할머니'와 동향인 사람이다.

 

 

 

 

 

 

 

 

 

 

 

 

 

 

 

 

 

 

 

 

 

 

 

  '성 조지'는 로마군대의 관리인이었던 카파토키아 출신의 아버지와 유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지가 성인이 되기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고향인 이스라엘 '롯(LOD, 고대 지명 리따 lydda)'으로 아들을 데리고 떠났다.  성장한 조지는 17세에 로마의 기병대에 지원했는데,  용맹과 기사도와 친절함으로  명성을 얻어,  20대 초반에 백인대 대장이되고.  20대 후반에 천인대의 대장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로마황제 디오클레시아누스의 근위대원이 되었다.  황실근위대가 된것이다.

  서기 303년 로마제국 서열 2위였던 갈릴레우스가 사망하였는데  기독교인에 의한 암살이었다고 소문이났다.  이교도 탄압을 적극 주장했던  갈릴레우스였던 때문이다.  황제는 철저한 조사와 함께  필요하면 기독교인을 고문하라 지시했고,  모든 교회를 파괴하라 지시했으며,  로마인으로서 기독교를 믿는 자들은  로마 시민권을 박탈하라고 명령햏다.

  조지는 황제가 내린 명령이 적힌 포고문을 성벽에서 뜯어서 찢어 버렸다.  기독교인들이 도망치도록 도와주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황제 앞에 끌려가서도 자신의 신앙관과 황제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지적함과 동시에 기독교인들의 정당성을 탄원 하였다.  결국 황제의 분노를 사서  '그가  기독교 신앙을 버리겠다고 할때까지 고문을 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수많은 악랄한 고문이 뒤따랐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신앙을 고수해했다.

  서기 303년 4월 23일  조지는 니코데미아 성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신은  이스라엘 롯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무덤이 롯에 있다.

  서기 494년 교황 젤라시우스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 되었다.

  그가 바로 '조지아의 수호성인  '성 조지(St. Georgius)' 이다.

'성 조지'는  조지아 뿐만이 아니라,  보이스카웃트 연맹의 수호성인 이자,  이탈리아 베니스,  스페인 아라곤, 카나다, 영국, 독일, 포루투갈, 불가리아, 슬로베나아, 스위스, 러시아 모스코바, 몰타의 수호성인이다.  인기가 많은만큼 몹시 바쁜 수호성인이다.

 

 

 

  리버티 스퀘어에서  도 하나의 명물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리칼라 요새 윗쪽에 우뚝 서있는  '조지아 어머니 상' 이다.

  이미 여러차례 거론했던 터여서 건너 뛰고  도심 투어를  다시 계속해 나가자면........

  트빌리시의  가장 중심 도로이자  스탈린 일행이 트빌리시 은행을 털었고 또 달아났던  루스타 벨리 대로를 가장 먼저 가보아야만 하겠다.

  리버티 스퀘어에 있는 트빌리시 시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관공서들이  루스타벨리 도로 안쪽에 공공기관과 은행과 박물관과 함께  모두 들어서서  장미혁명 광장 까지에 이르는 트빌리시 최고 중심가를 이룬다고 할 수 있겠다.  옛 국회의사당, 국립 박물관. 오페라 하우스. 우체국. 시청 등이 모두 이곳에 있다.

  2년 전 방문때만해도  메테히 교회아래 '평화 광장'에 있던  '트빌리시 관관 안내소'가  리버티 광장 한 켠의  푸쉬킨 공원 마당으로 이전하였다.  조지아 여행이나 트빌리시 여행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곳이라 하겠다.

  그럼 이제부터  루스타벨리 도로를 출발해 장미혁명 광장까지 산책을 해보기로 하겠다.

 

 

 

 

 

 

                                     

 

 

 

 

 

 

 

 

 

 

 

 

 

 

 

 

 

 

 

 

 

 

 

 

 

 

 

 

 

 

 

 

 

 

 

 

 

 

 

 

 

 

 

 

 

 

 

 

 

 

 

 

 

 

 

 

 

 

 

 

 

 

 

 

 

 

 

 

 

 

 

 

 

 

 

 

 

 

 

  지하철을  타고 '장미혁명 광장'을 가려면  '리버티 광장 역'에서 한 블럭 떨어진 곳에서 내려야 한다.

  이 지하철 역의 이름이 '루스타밸리 역'이다.  그런데 좀 의아한 생각이 든다.  이 지하철 역을 나오면  정면에 트빌리시 시청이 있고   좌측으로 루스타밸리 공원이 있고  건너편에 장미혁명 광장이 있다.  '리버티 광장 역'을 보자면  이곳을 '장미광장 역' 이라 하든지,  우리나라로 치면 당연히 '시청 역'이라 했을 터인데  쌩뚱맞게 '루스타밸리 역'이다.  그러고 보니  리버티 광장에서 여기까지 이르는 도로의 이름도 '루스타밸리 애비뉴'이다.

  그렇다면  조지아에 있어서 루스타밸리는 무엇인가?  사람인가?  혁명 기념일이라도 되는걸까?

 

  '쇼타 루스타밸리(Shota Rustaveli)'는  12세기 경에 활동했던 조지아의 시인이다.

  러시아에 '막심 고리끼'가 있고,  영국에 '세익스피어'가 있다면   조지아에는 '루스타밸리'가 있다고  내세울만큼  조지아 민족문학사에서 가장 으뜸으로 중요시 되는 시인이다.  조지아인들이 너도나도 자랑하는  국가적인 대서사시 '표범 가죽을 두른 기사'가 그의 대표작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루스타밸리'의 존재에 대해서 다분히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동시대의 기록물이나  남겨진 유물이나 유산 등  그 어디어서도  루스타밸리에 대한 기록이나 이야기가 남겨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지은 서사시  내용중에  '자기 자신을  루스타밸리라고 지칭했다는 대목' 정도가 그에대한 전부이다. 

  조지아의 민족화가  '티모테 가바슈빌리'가  서기 1757년에 성지순례로 예루살렘을 찾았다가 한 수도원에 그림을 남긴것이 1960년에 발견되었는데,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 그 그림의 주인공이 '쇼타 루스타밸리'로 밝혀졌다.

  그림의 내용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는데,  루스타밸리는  실존 인물이며  조지아의 최고 전성기 '타마르 여왕'의 재위 기간에  재무대신의 지위로 봉직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미 고대문학사 연구에서 '일리어드와 오딧세이'를 쓴 '호머'에 대해서 다각적이고 다양한 연구를 한 경험이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 '호머'가 나서서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는 한  지금 당장 호머가 정말  대서사시를 혼자 집필한 위대한 작가인지는 별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있다.  오직 '일리어드와 오딧세이'라는  위대한 문학 작품이 중요할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적어도 나는.......  '쇼타 루스타밸리'의 (표범 가죽을 두른 기사)도 같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는  조지아인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자존심으로 루스타밸리를 존경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극히 일부의 학자들은 이런 견해를 피력했다.

  '타마르 여왕'이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게 재무대신으로서 온갖 정성과 열의를 다해 '루스타밸리'가   여왕을 보좌하였는데.........  속마음으로는 여왕에게 충성과 존경 이상의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서사시를 집필하였고  여왕에게 작품을 헌정했다고........

 

 

 

 

 

 

 

 

 

 

 

 

 

 

 

 

 

 

  이 여인을 만나는 남자들은 모두 그만 사랑에 빠져버리게 만드는 태양처럼 빛나는 '네스탄' 이라는 공주가 있다.

  어느날 그녀에게 '표범 가죽을 두른 기사'라는 별명을 가진  아주 멋진 남자가  동화나 전설이 아닌 실존하는 사람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의 구애를 도도하게 떨쳐냈던 네스탄이었지만  한번도 본적이 없는 가상의 인물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깊어져만 갔다.  이제 곧 거대한 나라의 여왕으로 즉위할 몸이었지만   지금 네스탄에겐  왕국도 여왕 자리도  부귀영화도  아무런 필요가 없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표범 가죽을 두른 기사'를 만나 그와 영원한 사랑을  나누고픈 간절함 뿐이었다.

  왕궁 수호기사인  탈리언 또한 공주를 보는 순간부터 사랑에 빠져버린 남자다.  탈리언은 늘 공주위 주위를 맴돌며 그녀를 보호해 왔다.  그런만큼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져만 갔다.  반면  지금 공주가 애간장을 태우며 가슴 아파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꿈속에서까지 찾아헤매도 찾을 수 없는 '표범 가죽을 두른 기사'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침내  네스탄은 한가지 결심을 하게된다.

  자신을 향한 호위무사 탈리언의 마음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네이탄은 탈리언에게  자신의 사랑을 약속한다.  단 조건은  '표범 가죽을 두른 기사'를 찾아 데려오는 조건이었다.

  공주의 속마음을 잘 알고있는 탈리언이었지만.........  공주를 위해서........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 공주의 제안을 승락한다.

  탈리언은 머나먼 여정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의 끝에서 '표범 가죽을 두른 기사' '리엘'을 찾아낸다.

  탈리언은  리엘에게  네스탄에 대해 이야기를  전하고  그를 왕국으로 초대한다.

  탈리언과 리엘이 함께  네스탄을 찾는다............... (당연히 이하 생략)

 

 

 

 

 

 

 

 

 

 

 

 

 

 

 

 

 

  바로 위 사진속 건축물의 이름은 '이멜리(IMELI)'다.

  하지만  이멜리란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행자라면 더더욱 아는 사람이 있을리가 없다.  그래서 부러 1950년대  트롤리가 지나가는 흑백 사진으로 (펌)해 온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지금 당장  트빌리시  장미혁명 광장 인근에 가면  사진속의  똑 같은 건물이 라임스톤의 옅은 황금색을 띠며 웅장하고 번듯하게 그대로 서 있다.  하지만 지금은 건물의 이름과 용도가 바뀐 전혀 다른 건물로 변신해 있다.  그래서 굳이 아주 옛날 사진을 가져온 것이다.

  내가 '루스타밸리 애비뉴'를 빠져 나가면서  가던 발걸음을 돌려  이멜리를 다시 쳐다보았던 것은........  마치 일부러 되돌아 앉은것 같은  '푸쉬킨 동상' 때문이다.  리버티 광장 한 구석을 차지하는  푸쉬킨 공원에서 '왜 지금 푸쉬킨이 저렇게 구석진 자리에서  막혀진 공사장 담벼락의 낙서를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점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것이  여기 '이멜리'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나는 생리적인 이유를 핑계로  이멜리 건물 안으로 보부도 당당하게 실제로 들어가 보았다.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의 위용을 또다시 절실하게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아침 식전댓바람에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산책을 하던 중에 이런 으리으리한 건물에 당당하게 안내까지 받으며 들어갈 수 있는  대힌민국의 위상을 또한번 여실히 절감해 본다.

  여기는 정장을 입고 와도 행동거지가 변변치 못하면 현지인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다.

  알. 럽. 대. 한. 민. 국.

 

 

  '이멜리(막스.레닌주의 연구소,Marx, Engels, and Lenin Institute )'는 1938년 완공 되었다.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 이후 최고의 건축가였던  '알렉세이 슈세프(Alexey Shchusev)'의 작품이다.  슈세프는  여기 이멜리 건축에 애착을 느껴 건물의 설계뿐만이 아니라 직접 시공함과 동시에 내부 인테리어까지를 모두 손수 맡아서 했다.  혼신의 힘을 모두 쏟아부었던 건물이다. 전등이며 문의 손잡이며 방마다 가구까지 직접 디자인을 했다.  그만큼 20세기 소련의 건축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이멜리는 다분히 교과서적인 뛰어난 건축물이었다.

  1991년 독립 이후에는 조지아 헌법재판소가 사용해 왔다.

  2007년 조지아 정부가 이멜리를 외국의 거대 호텔 자본에게 슬쩍 팔아 넘겨버렸다.

  조지아 문화계가 발칵 뒤집혔다.  비록 소련이라는 아픈 구시대가 남겨놓은 유산이지만,  역사적 가치를 넘어서 위대한 건축물로의 가치를 생각해서라도  이멜리는 결코 사라져서는 안되는 문화재라는 주장이었다.  트빌리시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은  몇발자국 떨어진 인근의 광장에서 장미꽃을 들고 시위를 벌여 부패한 독재자 세바르드나제 정권을  퇴진 시켰던 2003년의 '장미 혁명'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간 띠를 만들어 공사장 출입을 저지했고 공사벽마다  스프레이로 철거를 중단하라는 구호를 써나갔다.

  경제적 자주독립과 개방적 시장경제를 부르짖는 정치가들이 국유재산을 함부로 외국 기업에 팔아 넘기고,  그 과정에서 일부 재벌과 특혜를 나누어 가지면서  또 하나의 신흥 지배계급으로 도약하는 온갖 부조리에 국민들이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사는 중단 되었다.

  문화계와 국민들의 새로운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국가와 외국 자본간에 이미 체결된 계약까지 되돌리 수는 없는 문제였다. 

  약간의 타협이 이루어 졌다.

  건물의 전면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외형은 그대로 되살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 20세기의 위대했던(?) 건물은 현재 장미혁명 광장에서 므츠바리 강변쪽으로 태산처럼 우뚝 솟아있는  푸른색 호텔건물의 부속건물로  재건축 되었다.  이 부속건물의 용도는 '카지노'다.  조지아를 통털어  최고로 치는 '** 카지노'가  바로 이멜리 건물에 들어서서 영업을 하고 있다.

  태어나 처음으로 들어가 본  카지노는 정말로 정말로  화려하고 모두가 최고급 이었다.  정말로 어마무시 했다.

  내가 알고 기억하는 이멜리의 모습은  건물 전면의 모습 뿐이다.  그래서  아주 옆면에서 삐끔 보이는 사진 외에는 별도로 찍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허상을 바라다 보고 있는 심정이었다.

  푸쉬킨이 가로막힌 공사벽을 바라보는 건물에 대해서도  그런 이유로 관심을 가져 보았다.  어마어마한 부지에 어마어마한 건축물이 들어서고 있는 현장이다.  2년 전에는 완전히 공사가 중단되어서  사방에 철골 구조물이 녹이 슬고  자재가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 한창 공사를 재개하고 있다.  바라보자니  그 건물 또한  거대자본에 의한 호텔과  카지노가 들어서는 것으로 보여진다.  공사 중단의 구호와 낙서가 사방에 즐비하다.

  올드 시티의 한복판인  리버티 스퀘어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면   땅값이 가장 비쌀만큼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대단히 가치있던 건물이 놓여있던 자리였을 것이다.  주변 자료와  과거 사진과 지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지번 외에는 알 수 있는것이 아무것도 없다.

  혹시나,  스탈린이 털어갔던  '트빌리시 은행'이 있던 자리가 아니었을까?

 

  신흥 독립국가로서 시장 경제를 급속하게 도입해야만 하고  자본을 축척해야만 생존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이미 그런 시대를 경험한 한국인으로서 당당하게 하나의 교훈을 준다면.........  급속 성장은  그만큼  부정. 부패도 가속도를 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공익을 가장한 하이에나들이 머지않아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는 우려를 미연에 방지해야만 할것이다.  한국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혁명이라는 것에도  '정당한 혁명'과 '그릇된 혁명'이 있다고 흔히들 말을 하지만...........  모든 혁명의 본질은 별반 다르지 않더라는 사실만은 꼭 명심해 주길 나는 간곡하게 바라고 싶다.

 

 

 

 

 

 

 

 

 

                 

 

 

 

 

 

 

 

 

 

 

 

 

  이곳에서 내가 가고자했던 다음 코스인  벼룩시장을 찾아가자면  당연히  우측 언덕길을 내려가서 강변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 옳겠으나,  나는 좀더 가던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필하모니 스퀘어(Philharmony S quare) 까지는 꼭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뮤즈(Muse)'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이상하게도 이 아름다운 뮤즈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나에게 누군가가  '굳이 조지아를 와야만 하는 이유'  '트빌리시를 꼭 들려야만 하는 이유'를 꼽으라 한다면.......  '뮤즈'를 만나고 싶어서라고 대답하겠다.

  '뮤즈(Muse)'라고 하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과 학문의 여신이다.  춤과 노래·음악·연극·문학에 능하고,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는 예술의 여신이다.

  나는 지금 그 뮤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녀는  트빌리시  콘서트 홀(오페라 하우스)  옆에 살고 있다.

 

 

  내가 트빌리시의 뮤즈를 떠올릴때마다  항상 나와 똑 같았을 심정의 한 사람이 항상 생각이 난다.

  그는 프랑스 사람으로 '20세기의 지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인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다.  '인간의 조건'이란 대표작을 소장한 소설가 이자  프랑스 문화부 장관을 지낸 정치가이기도 하다.  그런 훌륭한 품성을 소유한 소위 지식인의 대표주자인  말로에게 치명적인 과거가 하나 있었다.  바로 절도 전과였다.  그것도 국제 범죄사범이다.  이 전과 기록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지만  그의 생애와 업적에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그의 일생은 누가뭐래도 지성인 그 자체였으니까.......

  20대 후반의 앙드레 말로는  동남아시아를 여행했다.  역사와 미술사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그였기에 상당히 오랜기간을  캄보디아에 머물면서  프랑스 유적발굴단이 앙코르 유적군을 발굴하고 보존하고 복원하는 작업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앙드레 말로는  정글 속에서 뮤즈를 만났다.  마치 트빌리시 길거리에서의 나 처럼 말이다.

 

 

 

 

 

                

 

 

 

 

 

 

 

  뮤즈에 이름은 '데바타'였다.

  성스러운 탑을 지키는 여자 수문장이었다.

  힌두교 신화에 따르자면 문지기는 주로 남자였지만,  남자신 시바와 비슈누가 가끔식 여자신으로 변모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풍만하면서 생동감 넘치는 유려한 몸동작의  데바타에게  앙드레 말로가 그만 빠져들고 만것이다.

  '데바타'는  '캄보디아의 모나리자'로 불려지고 있다.

  사흘 낮 동안을  앙드레 말로는  '반띠아이 쓰레이(Banteay Srei)' 사원을 찾아와 '데바타'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한가지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는 상당히 거액의 돈을 마련하여 밀렵꾼에게 '데바타'의 부조상을 훔쳐올 것을  주문한다.  여러날 걸려서  마침내  데바타가 말로의 손에 들어왔다.  데바타를 손에 넣은 말로는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다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세관에 의해 짐 보따리 속에 숨겨 두었던  데바타가 발각되었다.

  캄보디아는 물론  프랑스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앙드레 말로는 젊은 나이에 이미 프랑스 문화계의 찬란하게 떠오른 혜성이었던 때문이다.  이 뉴스는 곧 온 유럽에까지 펴져 나갔다.  프랑스 정계와 문화계는 '국가적 망신' 이라고 말로를 멸시하고 규탄했다.  프랑스의 지원을 목말라하던 캄보디아는 약간의 벌금형으로  말로를 풀어주고 프랑스로 송환 시켜버렸다.  데바타는 다시  반띠아이 쓰레이로 돌아가 있던 자리에 복원되었다.

  온 유럽이 들고 일어나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앙드레 말로의 절도죄는 사실상 별반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도대체 데바타가 무엇이기에'  '데바타가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앙드레 말로 정도되는 젊은 지성인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까지 범죄를 저질렀느냐' '데바타가 궁금하다' 로 이어지면서  너도 나도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군으로 서로 먼저 가겠다고  길다란 러시 행렬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꼭 그런 심정이다. 나도.

  동남아 뿐만이 아니라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그동안 수많은 그림과 조각들을 보았지만........  그저 훌륭하고 아름다운 미술작품일 뿐이지  그것을 '갖고 싶다'라는 욕망으로까지 승화시킬만한 작품은 이제까지 없었다. 

  그런데 2년전 트빌리시를 걸어다니다가 아주 우연히 콘서트 홀 앞에서 (뮤즈)를 보게 되는 순간,  나도 한참 동안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또 뮤즈를 찾아갔었다.

  '가졌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생각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여기 '뮤즈'라면 어떻게든 집으로 가져가서  크기가 있으니까  내가 매일 드나드는  길목 어딘가에 놓아두고 항상 보고 싶어진다.

  이제껏 내가 소유욕을 가지고 바라보는 유일한 미술품이 바로 (The Muse)로 유일하다.  돈이 있다면  실물 크기로 복제라도 했으면 싶다.

  이런 심정을 노래로 고백한다면 바로 '닐 세다카'의 노래가 제격이 아닐까?.

  적어도 알드레 말로는 이런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지?  아마도.

 

       'Oh my darling I love you so / You mean everything to me'

 

 

 

 

 

 

 

 

 

 

 

 

 

 

  전혀 거부감이 없는 멋들어진 육감적인 포즈,  뇌쇄적인 볼륨의 풍만함,  도발적인 요염한 표정의 여신이 그곳에 살고있다.

  르노와르의 그림에 들어있는 풍만한 여인상에 더하여  안젤리나 졸리의 요염함을 더하고  애슐리 쥬드의 지적스러운 멋을 더한다면 바로 저런 뮤즈가 탄생할 것 같다.

  3D 프린터 기술에 의지해서  모조품을  하나 만들어 볼까?

 

 

 

 

 

 

 

 

 

 

 

 

 

 

 

 

 

 

 

 

 

 

  뮤즈를 만나기 위해 멀리까지 나왔던 관계로  벼룩시장까지 가는 길이 상당히 멀어졌다.

  골목길을 구경하면서 일단 장미 광장까지 되돌아 와서는 언덕 아래의 골목길을 다시 내려간다.  미로처럼 서로 얽혀있지만  어떻게든 낮은쪽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가다보니 강변도로가 나왔다.

  인도가 가다가 끊기거나  인도와 차도가 아예 구분이 안되는 곳들이 간간히 있어서  걸어가기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열심히 다가오는 차를 향해서 손을 흔든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야  드라이 다리(Dry Bridge)가 저만치 모습을 드러낸다.

  트빌리시의 벼룩시장(Dry Bridge Market)에 당도한 것이다.

  이곳 벼룩시장은 좀 너저분하고 무질서해 보인다.

  반면에 벼룩시장이 들어선 면적이 상당히 넓고 대부분의 상인들이 여유가 넘치며 친절하고,  코카서스 지역의 특색을 가진 상당히 많은 다양한 물건들이 전시되고 거래된다.  생전 처음보는 물건들로 넘쳐난다.  현지인은 물론 여행자들로 항상 붐빈다.

  내가 트빌리시 벼룩시장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는 곳은  미술작품을 노천에 전시하며 판매하는 시장을 가장 좋아한다. (No Poto)라는 소리를 전혀 안들어서 가장 좋고,  가끔은 현장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구경 할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노인 화가분들과 대화를 나눌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짜짜(손수 담군 보드카)를 얻어 마실수도 있다.  알콜 도수가 60도나 나가는 진짜 보드카 말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많은 인파로 붐빈다.

  하긴 그래야 벼룩시장 맛을 제대로 느껼 볼 수 있는것이 아닌가?

 

 

 

 

 

 

 

 

 

 

 

 

 

 

 

 

 

 

 

 

 

 

 

 

 

 

 

 

 

 

 

 

 

 

 

 

 

 

 

 

 

 

 

 

 

 

 

 

 

 

 

 

 

 

 

                                     

                                           --- 2018년의 벼룩시장 할머니.                                                ----  2016년에 만났던 할머니 모습.

 

 

 

 

 

 

 

 

 

 

 

 

  저런 물건들이 실제로 거래가 될까 싶은 것들이 많이 눈에 보인다.

  소련 시대의 유물인  군사용품들도 간간히 보인다.

  2년 전 여행에서  반지 두개와 팔찌 두개를 샀던 할머니 노점상도 여전하시다.  아는 얼굴을 만나니 은근히 반갑기까지 한다.  2년 전에 비해서 물건이 늘었고 좌판도 더 넓어졌다.  장소도 벼룩시장 한복판으로 진출하셨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 성업중이시다.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벼룩시장은  시간 가는것을 잊게 만들어 준다.

  트빌리시에서 가장 무질서한 장소로 느껴지지만  그 속에 독특한  벼룩시장만의 깊은 맛 또한 느껴진다.

  이제는 미술품 감상하러 발길을 옮겨야 하는데........

 

 

 

 

 

 

 

 

 

      ------    이래가지고는 도저히   한 회분량으로  '트빌리시 도시여행'을 끝마치지 못할것 같다.  이미 너무 길어졌는데.....  아직도 갈곳은 많고.......

  부득히 남은 트빌리시 여행은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나가야만 하겠다.   감사합니다.  다음으로 이어가겠습니다.    피안재.

 

 

 

 

 

 

 

 

 

 

출처 : 피안으로 가는 길
글쓴이 : 피안재 원글보기
메모 : 언젠가 가보고 싶은 곳. 트빌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