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커 농장 ]
o 349~350 - 나는 차나 커피, 우유 등도 마시지 않고, 버터나 신선한 육류도 먹지 않기에 그런 것을 얻고자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일을 많이 하지 않으니 많이 먹을 필요도 없고, 결과적으로 음식을 장만하는 데 많은 돈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댁은 차, 커피, 버터, 우유, 소고기 등을 기본적으로 먹어야 하니, 그것을 얻기 위해 힘들게 일해야 하고, 일을 많이 하면 소모된 체력을 보충해야 하니 당연히 많이 먹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러니 살림이 늘 거기서 거기인 게다. 아니, 늘 만족하지 못하는 데다 삶까지 허비하고 있으니, 갈수록 더 나빠지기만 할 수밖에 없다.
o 354 - 멀리 너른 곳으로 매일 낚시와 사냥을 나가거라. 더 멀고 더 너른 곳으로. 그리고 개울가든 화롯가든 두려워하지 말고 편히 쉴지니. 젊었을 때 그대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새벽이 오기 전에 근심에서 벗어나 모험을 찾아 떠나라. 낮에는 날마다 다른 호숫가에 머물고, 밤이면 어디가 됐든 집을 삼아 쉬도록 하라. 이곳보다 더 넓은 평원은 없고, 여기서 즐길 수 있는 놀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결코 영국의 건초가 되지는 않을, 저기 자라는 사초와 고사리처럼 그대의 천성에 따라 마음껏 자라나라. 천둥이 울리도록 하자. 그것이 농부의 작물을 망친다고 한들 어쩌겠는가? 그대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않는가. 남들이 수레와 헛간으로 피한다 해도, 그대는 구름 밑에서 은신처를 찾도록 하자. 돈 버는 것을 업으로 삼지 말고, 놀이로 삼거라. 땅을 즐기되, 소유하지는 말라. 진취성과 신념이 부족한 탓에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고팔고, 농노처럼 삶을 소모하는 것이다.
[ 더 높은 법칙 ]
o 359 - 그때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는 더 높은 곳을 향하려는 본능, 다시 말해 정신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본능과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삶을 갈망하는 본능을 내 안에서 동시에 느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둘 다에 경의를 표한다. 나는 선함 못지않게 야생성도 사랑한다. 낚시에는 야생성과 모험의 요소가 둘 다 들어 있기에 나는 여전히 그것에 끌린다. 가끔씩 나는 인간다운 일상을 접어 두고 좀 더 동물 친화적인 방식으로 하루를 살아가기도 한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낚시나 사냥을 다닌 덕에 자연과 특히 친밀해져 그런지도 모르겠다. 낚시와 사냥은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좀처럼 접하기 힘든 풍경을 만나게 해 주고, 그 속에 머물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어부, 사냥꾼, 나무꾼 그 외에도 들판이나 숲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들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기대감을 품고 자연에 접근하는 철학자나 시인들보다 훨씬 호의적인 태도로 자연을 대한다. 일손을 놓고 쉬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다. 대초원을 여행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냥꾼이 되고, 미주리강이나 컬럼비아강 상류에서는 덫을 놓는 사냥꾼이 되며, 세인트 메리 폭폭에서는 낚시꾼이 된다. 단지 여행객에 지나지 않는 자는 세상을 간접적으로 절반밖에 배우지 못하기에, 자연을 속속들이 아는 권위자는 될 수 없다. 따라서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실제 경험을 통해, 혹은 본능적으로 이미 파악하고 있는 사실을 과학이 보고할 때, 사람들은 매우 큰 관심을 보인다. 그런 과학이야말로 진정 '인도주의적'인 학문이자, 인간의 경험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o 363 - ... 사리 분별에 밝지 못한 소년기를 지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간과 똑같은 자격으로 삶을 살아가는 동물을 아무런 이유 없이 살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토끼도 궁지에 몰리면 어린아이와 똑같이 울기 마련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게 경고하건대, 내 동정심은 결코 인간에게만 향해 있지 않다.
청년이 숲과 자신의 가장 원초적인 자아의 만남을 주선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그는 단지 사냥꾼이나 낚시꾼의 자격으로 숲을 찾는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 더 나은 삶을 살아갈 만한 씨앗을 품고 있다면, 시인과 자연주의자가 그러하듯이 마침내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목적을 알아내고 총과 낚싯대를 내려놓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대부분의 사람이 아직도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
o 365~6 - 생선을 잡아먹는 식습관은 육류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뭔가 청결하지 못한 면이 있다. 이제 나는 집안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안다. 매일 깔끔하고 우러러볼 만한 집의 외양을 갖추기 위해, 악취와 더러움을 없애 집을 향기롭게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이 들어가는지도 잘 안다. 나는 내가 만든 음식을 대접받는 신사일 뿐 아니라, 내 스스로 푸주한이자 접시닦이이고 또 요리사이기도 했다. 따라서 드물게 완벽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육류를 반대하는 실제적인 이유가 그것의 불결함 때문이다. 게다가 고기를 잡아와 손질한 후 요리해 먹어도, 그것이 정말 내게 필수적인 영양분이 되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솔직히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며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는 생각도 들었다. 약간의 빵과 몇 개의 감자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수고도 덜 들고 불결하지도 않으며 영양적 측면에서도 뒤지 않았을 듯했다.
o 368~370 - 내면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는 희미하기는 해도 의심할 여지가 없이 진실하다. 따라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그 진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처음에는 혹시라도 그것이 어떤 극단적인 행위나 미친 짓으로 자기 자신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의지를 굳히고 신념을 키워 가다 보면, 그 길이 바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임을 깨닫게 된다. 건강한 이가 느끼는, 희미하지만 단호한 반발심이 결국에는 인류의 주장과 관습을 넘어 승리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면의 목소리가 자신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끔 넋 놓고 앉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행여 그 목소리를 따른 결과가 육체적인 허약함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더 높은 법칙을 따르는 삶이므로, 어느 누구도 그 결과가 후회스럽다 한탄할 수는 없으리라. 우리가 낮과 밤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삶이 꽃이나 달콤한 허브처럼 향기를 발산하고, 좀 더 유연해지며 별처럼 빛나고 더욱 영원에 가까워진다면, 그런 삶이야말로 성공한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자연 전체가 우리를 축복하면 우리도 시시각각 스스로를 축볼할 이유를 얻게 될 것이다.
최고의 이익과 가치는 오히려 인식하기가 힘든 법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이 존재하기는 하느냐고 쉽게 의심한다. 그리고는 곧 잊어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높은 곳에 존재하는 실재다. 어쩌면 가장 놀라운 실재는 결코 인간에게서 인간으로 전해지는 법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일상에서 거두는 진정한 수확은 아침이나 저녁의 빛깔처럼 손으로 만질 수도,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손에 쥔 자그마한 별의 조각이며 움켜잡은 무지개의 조각이다.
나는 유별나게 비위가 약한 사람은 아니다. 구운 사향쥐라도 반드시 먹어야 한다면 얼마든지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나는 아편쟁이의 천국보다는 자연 속의 하늘을 더 좋아한다. 그와 같은 이유로 음료도 오랫동안 물만 마셔 왔고, 그 사실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취하는 정도에는 무수한 많은 단계가 있는데, 나는 늘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물이야말로 현자를 위한 유일한 음료라 생각한다. 포도주는 그다지 고상한 음료가 아니다. 한 잔의 따뜻한 커피로 아침의 희망을 부숴 버리고, 한 잔의 차로 저녁의 희망을 부숴 버릴 수 있음을 아는가! 아, 그러한 음식에 유혹을 느낄 때, 나는 얼마나 낮은 곳으로 추락하는 것일까! 심지어는 음악도 사람을 취하게 한다. 바로 그런 사소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것들이 그리스와 로마를 멸망시켰다. 이제 그것이 영국과 미국도 파괴해 버릴지 모른다. 그러니 기왕에 취해야 한다면, 자신이 마시는 공기에 취하기를 바라는 것이 어떻겠는가?
내가 힘든 육체노동이 오래 지속되는 것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노동을 하면 엄청나게 먹고 마시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근래 들어 나는 그런 면에 있어서는 별로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 식탁에 종교를 끌어들이는 일도 적어졌고, 식전 기도를 올리지도 않는다. ...
o 372~3 - ... 자신이 먹는 음식의 진정한 맛을 아는 이는 결코 음식에 욕심을 부리지 않으나, 그렇지 않은 이는 폭식할 수밖에 없다. 시의원이 거북 요리를 탐내듯이 청교도가 저속한 식욕에 굴복해 갈색 빵 껍질에 달려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을 때의 식욕이 인간을 더럽힌다. 먹는 행위가 우리의 동물적인 생명을 지탱하거나 정신적인 생명에 영감을 불어넣지 못하고 우리를 소유한 구더기의 양식이 돼 버릴 때, 문제는 음식의 질이나 양이 아닌 감각적 풍미에 대한 우리의 탐닉이 된다.
사냥꾼이 흙탕거북과 사향쥐, 그 외에도 여러 야만적인 한입거리에 입맛을 다시는 것과 고상한 귀부인이 송아지 발로 만든 젤리나 바다 건너온 정어리의 맛에 탐닉하는 것은 오십보백보라 할 수 있다. 사냥꾼은 물레방아가 도는 호숫가로, 귀부인은 저장용 항아리로 향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어떻게 그들이, 내가, 그리고 독자 모두가, 먹고 마시기 위해 이 비열하고 야만적인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지 놀랍기만 하다.
우리의 삶은 놀라우리만치 도덕적이다. 미덕과 악덕 사이에는 한순간의 휴전도 없다. 선이야말로 결코 손해 보지 않을 유일한 투자다. ...
o 376 - 모든 감각적인 욕망은 아무리 여러 형태로 나타날지라도 하나에 불과하다. 순수함도 마찬가지다. 한 인간의 감각적인 행위는 그가 먹거나 마시거나 누군가와 함께 살거나 잠을 자거나 늘 똑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그 모두가 단지 한 가지 탐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떤 이가 얼마나 감각적인 욕망에 휘둘리며 사는지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가 이런 행위 중 하나를 어떻게 해내는지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불결한 자는 순결과 함께 서지도 앉지도 못한다. 파충류처럼 비열한 자는 한쪽 굴의 입구를 공격당하면 반대편 입구로 달아난다.
순결하고 싶다면 절제해야 한다. ... 육신을 부단히 움직이는 데서 지혜와 순결을 얻을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나태함에서 무지와 감각적인 욕망이 오는 것이다.
o 379 - "얼마든지 영광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에도, 그대는 왜 이곳에 머물며 비천하고 고된 삶을 살아가는가? 저 위의 별들은 여기가 아닌 다른 들판 위에서도 반짝이고 있는 것을."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실제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갈 수 있을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새로운 금욕을 실천하여, 정신이 다시 육체 속으로 내려가 타락한 몸을 구원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점점 커져 가는 존경심으로 스스로를 대하겠다고 다짐하는 것뿐이었다.
[ 동물 이웃들 ]
o 381 - 은둔자 : ...
그나저나 오늘은 얼마나 수확을 했으려나. 개 짖는 소리에 마음 놓고 사색도 할 수 없는 저런 곳에서 대체 누가 살고 싶어할까? 아, 살림살이도 있지! 이처럼 날씨가 화창해도 더러운 문손잡이를 붙들고 광낸다고 애를 쓰고, 나무통을 벅벅 문질러 씻어야 하다니! 그럴 바에야 집이 없는 게 낫지. 차라리 나무 구멍에 들어가 사는 게 나을 거야. 그러면 아침 방문도, 저녁 만찬에도 손님이라고는 딱딱 쪼아 대는 딱따구리뿐일 테니까.
이 사람들은 너무 몰려 살아. 마을은 너무 덥기도 하고. 그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생활에 너무 찌들어 있어. 그런 삶은 내게는 맞지 않아. 나한테는 샘에서 길어 온 물이 있고, 선반 위에는 흑빵 한 덩이가 놓여 있지. ...
o 389 - 그곳에는 멧비둘기도 날아왔다. 그들은 샘가에 앉아 쉬기도 하고, 내 머리 위의 부드러운 스트로브잣나무 가지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날개를 퍼덕이기도 했다. 주변의 나뭇가지를 쪼르르 타고 내려오는 붉은 날다람쥐는 유독 스스럼없이 굴고 호기심도 많은 듯했다. 이처럼 숲속의 매혹적인 장소에 오래 앉아 있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그곳에 사는 모든 동물이 차례로 나타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