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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월든 Walden 8 : 겨울 동물, 겨울 호수, 봄 - 더 클래식 출

조앤디디온 2019. 3. 15. 11:57



[ 겨울 동물 ]

o 465 - ... 이처럼 깊고 외딴 산중에 사는 다람쥐까지도 무희가 춤을 출 때만큼이나 관중의 시선을 의식해 모든 동작을 취하는 듯했다. 나는 다람쥐가 여유롭게 걷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녀석들은 갈 길을 서둘러 가기보다는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다가 눈 깜짝할 새 어린 리기다소나무 꼭대기로 올라가서 시계태엽 감는 듯한 소리로 찍찍거리며 모든 상상 속의 관중을 나무라곤 했다. 가만 보니 독백도 하고, 온 세상을 상대로 말하기도 하는 듯했다. 물론 나는 대체 뭘 나무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고, 그 자신도 잘 모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o 468 - 박새는 몇 마리씩 무리를 지어 매일 날아와서는 장작 쌓아 놓은 곳에서 먹이를 집어 올리기도 했고, 오두막 문 앞에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주워 먹기도 했다. 그때 녀석들이 내는 희미한 혀짤배기 울음소리는 풀잎에 맺힌 고드름의 짤랑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데이 데이 데이'하며 활기 넘치게 노래하는 듯도 했다. 또 드물기는 해도, 봄날처럼 따뜻한 날씨에는 힘이 넘치는 여름을 연상시키는 "피-비" 소리가 숲 언저리에서 들려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주변에 익숙해졌는지, 어느 날은 박새 한 마리가 내가 한 아름 안고 가던 장작더미 위에 올라 않더니 겁도 없이 나뭇조각을 부리로 쪼아 댔다. 언젠가 내가 마을의 채소밭에서 김을 매고 있을 때도 참새 한 마리가 내 어깨 위에 잠시 내려앉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세상 그 어떤 명예로운 견장을 달고 있다 해도 결코 느낄 수 없을 듯한 영광스러운 기분을 느끼기까지 했다. 다람쥐도 마찬가지로 나와 친숙해져서 가끔씩 지름길이라 느껴지면 내 신발을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o 469 - 아직은 땅에 눈이 많이 덮이지 않은 초겨울이나 겨울의 막바지에, 남쪽 언덕 기슭이나 장작더미 주변에 눈이 점차 녹을 때면 자고가 아침저녁으로 먹이를 찾아 숲에서 나왔다. 그런 때 숲속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디선가 자고가 불쑥 튀어나와서 갑자기 날개를 퍼덕이며 급하게 도망쳤다. ...


o 469~471 - 어두운 겨울 아침이나, 해가 짧은 겨울 오후에 나는 가끔씩 한 무리의 사냥개가 추적의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 온 숲을 헤매 다니며 짖어 대는 소리를 들었다. ...

... 언젠가 사냥개에게 쫓기던 여우 한 마리가 월든 호수로 뛰어드는 장면을 목격한 일이 있는데, 그 때 호수는 표면의 얼음 위에 얕은 물웅덩이가 여러 개 생겨 있을 정도로 녹은 상태였다고 한다. 여우는 호수를 조금 건너가다가 다시 뛰어든 쪽으로 되돌아갔다. 머지않아 사냥개가 몰려 왔으나, 개들은 여우의 냄새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끔은 사냥꾼 없이 사냥을 하는 한 무리의 개들이 내 집 앞을 지나쳐 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녀석들은 오두막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내 존재는 전혀 개의치도 않고 사납게 짖어 대곤 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광기에 사로잡힌 듯했고 그 무엇으로도 녀석들의 추적을 멈추게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식으로 녀석들은 가장 최근에 생긴 여우의 흔적을 다시 찾아낼 때까지 그 자리를 뱅뱅 돌았다. 영리한 사냥개일수록 그 임무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o 476~7 - 아메리카산 토끼는 나와 매우 친해지기도 했다. 한 녀석은 내 집 아래, 정확히 말해 내 방바닥 밑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두고 겨울 내내 살았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내가 몸을 뒤척이기 시작하면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고 머리를 마루판 판자에 쿵쿵쿵 찧어 대는 통에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곤 했다. ...


[ 겨울 호수 ]

o 480 - 정적 속에서 겨울밤을 보내고 나면, 나는 꿈속에서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어디서'라는 식의 질문을 받고 헛되이 잠결에 답을 하려 애쓰다가 깨어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눈을 떠 보면 모든 피조물을 품은 자연이 새벽을 맞아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넓은 창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그 입술에는 아무런 질문도 얹혀 있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 질문의 해답인 자연과 햇살을 받아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어린 소나무가 점점이 박혀 있는 지표면에 깊이 쌓여 있는 눈과 내 집이 자리 잡은 언덕의 경사로는 "전진!"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자연은 인간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인간이 묻는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에 그렇게 작심을 했던 것이다.


o 482~3 - 만물이 추위로 얼어붙어 사각거리는 이른 아침에, 강꼬치고기와 농어를 잡겠다고 낚싯대와 가벼운 점심 꾸러미를 들고 찾아와서는 그 눈 덮인 들판에 가느다란 낚싯줄을 드리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마을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따르고, 다른 권위를 신봉하는 야성의 인간이다. 또한 그들이 오가는 덕에 마을 간의 교류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이들은 두툼한 모직 외투를 입고 호숫가의 마른 떡갈나무 낙엽 위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도시 사람들이 인공적인 지식에 밝다면, 이들은 자연의 지식에 밝다. 그들은 전혀 책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알거나 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해낸다. 그들이 행하는 일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o 484~5 - 강꼬치고기는 소나무 같은 녹색도 아니고, 돌처럼 잿빛도 아니며, 하늘처럼 푸르지도 않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들의 색이 귀한 꽃이나 보석처럼 드물기 그지없어 보인다. 그들은 월든의 진주다. 월든의 물이 동물화된 핵이며 결정체다. 그리고 물론 속속들이 월든 그 자체다. 동물의 왕국에서는 그들이 작은 월든, 즉 월든의 거주자다. 여기, 이 깊고 넓은 샘 속에, 가축과 마차와 방울을 딸랑거리는 썰매가 덜거덕거리며 지나다니는 월든 길옆에 깊이 자리한 물속에, 이 커다란 황금색과 에메랄드색의 물고기가 헤엄쳐 다니다니, 그리고 그런 물고기가 잡혀 올라오다니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o 487 - ... 나는 월든 호수가 깊고 맑아서 하나의 상징이 되어 주고 있음이 더없이 고마울 뿐이다. 인간이 무한함에 믿음을 두는 한, 바닥이 없는 호수도 계속 존재하리라.


o 493~4 - 인간이 모든 자연 법칙을 안다면, 하나의 사실이나 하나의 실제 현상에 대한 설명만 있어도 그 시점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의 구체적인 결과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단지 몇 가지 법칙만을 알고 있을 뿐이라 추측해 낸 결과는 허술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자연의 혼란이나 불규칙성 때문이 아니라, 계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법칙과 조화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직접 알아낸 사례들에 한정돼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찾아내지 못했기에 겉으로는 모순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일치하는 많은 법칙에서 찾아낼 수 있는 조화가 훨씬 더 경이로운 것이다. 개개의 법칙은 우리의 관점에 따라 무수한 측면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절대적인 형태를 갖춘 산이 나그네가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산을 쪼개거나 구멍 뚫는다고 해서 그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호수에서 관찰한 것은 인간 세상의 윤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것이 바로 평균의 법칙이다. 두 개의 지름을 이용한 그50런 규칙은 우리를 태양계 속의 태양으로, 그리고 인간 몸속의 심장으로 안내한다. 또한 한 인간이 매일 행하는 행동과, 그가 품은 작은 만과 그 안으로 밀려드는 삶의 파도를 모두 모아두고 그곳에 가로세로 양 방향으로 선을 긋는다. 그러면 두 선이 교차하는 곳이 바로 그의 온전한 성품에서 가장 높거나 깊은 부분이리라.


[ 봄 ]

o 509 - 얼음에도 나무와 마찬가지로 고유의 결이 있다. 따라서 사각형으로 채취해 놓은 얼음 덩어리가 녹기 시작하거나 '벌집'이 되면, 다시 말해 벌집 모양으로 변해 버리면, 얼음을 뒤집어 놓든, 기포가 원래 수면이었던 부분과 직각을 이루게 된다. 바닥에 바위가 있거나 통나무가 수면 가까이로 떠올라 있던 곳에서는 얼음의 두께가 훨씬 얇기에 반사열만 받아도 쉽게 녹아 없어진다.


o 510~1 - ... 해가 뜬 지 1시간쯤 지나자, 언덕 위에서부터 비스듬히 내리비치는 태양 광선의 영향으로 호수가 우르르 울리기 시작했다.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면서 점차 더 크게 몸을 움직여 갔는데, 그런 상태는 서너 시간 정도 지속됐다. 그러나 정오가 되니 잠시 낮잠에 빠져들었고, 태양이 그 영향력을 거두어들이는 밤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다시 깨어나 울리기 시작했다.

날씨만 좋으면 호수는 매우 규칙적으로 시간을 알리는 저녁예포를 쏘아 올린다. 그러나 그날 낮에는 얼음이 여기저기 깨어져 금이 갔고, 대기도 탄력을 잃어 호수가 전혀 울리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세게 얼음을 내리치더라도 물고기와 사향쥐가 놀라서 멍해지는 일은 없을 듯했다. 낚시꾼들에 따르면 '호수의 천둥소리'가 물고기들을 놀래서 전혀 입질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고 한다.

호수가 매일 저녁 천둥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기에 나는 언제 그 소리가 날지 확실히 예측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날씨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호수가 울리는 일이 있었다. 이처럼 크고 차고 두꺼운 존재가 그처럼 민감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러나 봄이면 어김없이 새싹이 트듯이 호수에게도 나름의 법칙이 있어서 때가 되면 반드시 천둥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다. 대지는 모두 살아 있으며 돌기로 뒤덮여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호수도 온도계 속의 수은 방울만큼이나 대기의 변화에 민감하다.


o 511~2 - 숲에서 살아가는 삶의 한 가지 매력은 봄이 오는 것을 지켜볼 여유와 기회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때가 되면 호수의 얼음은 마침내 벌집 모양이 되기 시작하고, 그러면 나는 얼음에 발뒤꿈치를 대고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안개와 비와 따뜻한 태양 덕분에 눈은 점점 더 빠르게 녹아내린다. 낮이 피부로 느낄 만큼 길어지니, 이제는 큰불을 피우지 않아도 돼서 더는 나무를 해 오지 않아도 겨울을 날 수 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봄의 첫 징조를 기민하게 살핀다. 이제 막 돌아온 새의 노랫소리나, 이때쯤이면 저장해 둔 식량도 다 떨어졌을 줄무늬다람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우드척도 겨울 보금자리에서 나올 때가 되었다.

o 512~3 - 어느 해던가 나는 얼음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 닷새 전에 호수 한가운데를 걸어서 건넌 적이 있었다. 1845년 4월 1일에 월든 호수는 완전히 녹았다. 1846년에는 3월 25일에, 1847년에는 4월 8일에, 1851년에는 3월 28일에, 1852년에는 4월 18일에, 1853년에는 3월 23일, 그리고 1854년에는 4월 7일에 얼음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강과 호수의 얼음이 녹고 날씨가 안정적으로 변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모든 사건은 기후가 양극단을 오가는 지역에 살아가는 우리 같은 사람의 흥미를 특히 끌어당긴다. 날씨가 점점 따뜻해질 때, 강변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밤이면 강이 대포 소리만큼이나 큰 소리를 내며 얼음을 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얼음으로 만든 족쇄가 끝에서 끝으로 끊어지는 소리다. 그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얼음이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대지의 진동과 함께 악어가 진흙 속에서 나타난다.


o 517~8 - 6미터 내지 12미터 높이의 둑 전체 중에서 한쪽, 또는 양쪽을 따라 400미터 정도 되는 거리가 가끔은 단 하루의 봄날이 만들어 내는 바로 이런 종류의 잎사귀 무늬로 뒤덮인다. 그런데 이 모래 잎사귀 무늬가 놀라운 것은 갑자기 툭 튀어나오듯 불시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간혹 아무런 변화도 없는 한쪽 둑을 바라보고 있다가, 무심히 반대편 둑을 돌아보면 그곳에는 1시간 전만 하더라도 아무런 자취가 없던 화려한 잎이 무성하게 자라 있다(태양은 원래 한쪽으로 먼저 떠오르지 않는가). 그러면 나는 세상과 나를 창조해 낸 바로 그 위대한 '예술가'의 작업실에 서 있는 듯한 참으로 묘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즉, 그 예술가가 여전히 힘이 남아돌아 작업을 하며 그의 새로운 구상을 여기저기 둑 위에 흩뿌려 놓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내가 지구의 생명이 분출하는 곳 가까이 있다는 느낌도 든다. 모래의 흘러내림이 동물의 내장과도 모양이 비슷한 잎사귀 형태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모래 속에서조차 식물의 잎이 태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o 522~3 - 머지않아 이 비탈뿐 아니라, 모든 언덕과 평원, 그리고 모든 계곡에서, 동면하던 네발 동물이 그 굴에서 빠져나오듯, 냉기가 땅속에서 일어나 노래 부르며 바다를 찾아 가거나 구름이 되어 다른 기후를 찾아 이동하게 된다. 부드러운 설득의 힘을 보이는 해동은 망치를 손에 든 토르보다 훨씬 강력하다. 토르는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지 않는가.

땅 위의 눈이 부분적으로 녹고, 며칠간 계속되는 온화한 날씨가 대지면의 습기를 어느 정도 말려 버리면,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부드러운 첫 징조가 대지를 뚫고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한다. 겨울을 견뎌 내고 이제는 시들어 버린 식물의 당당한 아름다움과 새싹의 싱그러움을 비교하는 일도 즐거웠다. 보릿대국화, 메역취, 핀위드, 우아한 야생 들풀 등이 마치 지난여름에는 완숙한 아름다움을 보여 주지 못했다는 듯 그때보다 훨씬 선명하게, 그리고 자주 눈에 띄며 흥미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는 황새풀, 부들, 우단현삼, 물레나물, 조팝나무, 피리풀 같은 강한 줄기의 식물도 눈에 띄었는데, 그들은 일찌감치 찾아온 새들에게 아직 다 고갈되지 않은 자연의 곡식 창고가 되어 주었다. 그 식물들은 미망인이 된 자연이 입고 있는 점잖은 상복이었다.


o 526~7 - 띠처럼 녹은, 기쁨과 젊음을 발산하는 호수의 맨 얼굴이 태양 아래 반짝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없이 영광스러운 기분이 느껴진다. 호수가 마치 그 안에 사는 물고기나 호반을 덮고 있는 모래의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 황어의 비늘처럼 은빛을 발하는 그 모습은 살아 있는 한 마리의 물고기나 다름없다. 그것이 바로 겨울과 봄의 차이점이다. 죽이 있던 월든 호수가 이제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이번 봄에는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훨씬 느리게 얼음을 가르는 중이다.

눈보라가 치던 겨울이 고요하고 온화한 날씨로, 어둡고 굼뜨게 움직이던 시간이 밝고 탄력 있는 시간으로 바뀌는 과정은 만물이 성명을 발표하는 매우 중대한 순간이다. 변화는 불시에 일어난다. 겨울 구름이 여전히 하늘에 걸려 있고, 처마에서는 진눈깨비를 동반한 빗물이 떨어지며,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한 어느 날 저녁이었다. 갑자기 햇살이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세상에! 어제까지만 해도 차가운 잿빛 얼음이 놓여 있던 곳에, 투명한 호수가 자리해 있는 것이 아닌가. 여름 저녁처럼 잔잔하고 희망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하늘에는 여름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도 않았지만, 멀리 떨어진 지평선과 교신이라도 하는지 호수는 투명한 가슴에 여름의 저녁 하늘을 그득 담고 있었다.


o 530~2 - 보슬비가 한 번만 내려도 그늘에서 자라는 풀은 푸르게 물든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더 나은 생각을 받아들이면 앞으로의 전망을 밝힐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늘 현재에 살아간다면, 그리하여 풀잎이 자신 위로 떨어지는 작은 이슬방울의 영향력까지도 모두 드러내 보여 주듯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의 이점을 이용한다면, 또한 과거에 주어진 기회를 소홀히 한 것을 속죄하느라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면서 그것이 마치 의무를 다하는 행위인 양 여기지만 않는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터다.

이미 봄이 왔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겨울 속을 헤맨다. 따스한 봄날 아침에는 모든 인간의 죄가 용서받는다. 그런 날은 악덕과도 휴전한다. 그런 봄날의 태양이 활활 타오르는 동안에는, 가장 극악한 죄인도 돌아올지 모른다. 나 자신의 순수함을 되찾게 되면, 우리는 이웃의 순수함도 알아볼 수 있다. 어제만 해도 당신은 이웃 사람 하나를 도둑이나 주정꾼, 혹은 호색한이라 오해하고는 단지 동정하거나 경멸하면서 세상을 개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양이 밝고 따뜻하게 비추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가운데 맞이한 이 첫 봄날 아침, 당신은 차분하게 일에 몰두하는 그를 만난다. 그리고 방탕으로 지친 그의 혈관이 지금은 기쁨으로 얼마나 크게 부풀어 올랐는지, 또 그가 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봄의 영향력을 느끼며 어떻게 새로운 날을 축복하고 있는지 보게 된다. 그 아름다운 순간 당신은 그의 모든 허물을 잊게 된다.


o 536~8 - ... 우리는 모든 것을 탐구해 배우고자 하는 열망만큼이나, 모든 것이 신비롭고 탐험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더불어 대지와 바다가 야성의 상태로 무한히 남아 있기를, 측량할 수 없기에 탐사되지 않고 헤아리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인간은 절대로 자연에 질리지 않는다. 그 지치지 않는 활력, 광활함, 거대한 모습, 난파선이 떠밀려 온 해안가, 살아 있는 나무와 썩어 가는 나무가 공존하는 황무지, 천둥을 몰고 오는 구름, 3주나 쏟아지며 홍수를 일으키는 비,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새롭게 활기를 찾는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가 무너지는 모습을 목격해야 한다. 인간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 곳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는 생명체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동물의 시체는 우리를 역겹게 하고 낙담하게 하지만, 독수리가 그것을 뜯어 먹고 건강과 힘을 얻을 때 우리도 기운을 얻는다. ...

나는 일부 생명체가 다른 존재에게 희생되기도 하고, 서로 먹고 먹히며 살아가도 좋을 만큼 자연이 수많은 생명체로 가득찬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러면 연약한 유기체가 과육처럼 조용히 짓눌려 죽어 가도 괜찮지 않겠는가. 왜가리가 올챙이를 꿀꺽 삼키고, 거북이와 두꺼비가 길에서 치어 죽더라도, 가끔은 살과 피가 비처럼 내리더라도! 사고야 언제든 날 수 있지만, 그에 대한 해명은 늘 충분치 않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런 때 만물의 보편적인 결백을 깨닫는다. 독이란 것도 결국은 전혀 위험하지 않고, 어떠한 상처도 치명적이지 않다. 연민이 설 자리란 없다. 그것은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 연민에 따른 변론이 당연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o 539 - 내가 숲에서 보낸 첫 해의 삶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그리고 두 번째 해도 이와 많이 다르지 않았다. 나는 1847년 9월 6일 마침내 월든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