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
o 14 - 나는 수년 전부터 토마시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보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사유의 밝은 빛 덕분이었다. 안마당 건너편 건물 벽에 시선을 고정하고 아파트 창가에 서 있던 그를 나는 보았다. 그는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삼 주 전쯤 보헤미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테레자를 만났다. ....
o 15, 16 - 그는 그녀와 합치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닐까?
그는 건너편 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앞마당을 멍하니 바라보며 답을 찾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리고 변함없이 소파에 누운 이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과거 그녀의 삶에 등장했던 어떤 여자와도 닮지 않았다. 그녀는 애인도, 부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서 꺼내져 그의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인 아기였다. ... 그녀의 입술에서 신열의 약간 텁텁한 냄새가 느껴졌고 그는 마치 그녀 육체의 은밀함 속에 파묻히고 싶다는 듯 그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 순간 그녀가 오래전부터 그의 몸속에 있어 왔고 지금 죽어 가고 있다는 상상이 들었다. 불현듯 그녀가 죽고 나면 자신도 살아남지 못하리란 것이 너무도 당연한 진실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녀 곁에 나란히 누워 함께 죽고 싶었다. 그는 이러한 상상에 잠겨 그녀의 얼굴에 뺨을 대고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그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체험한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을끼? 그는 그녀 곁에서 죽고 싶었다고 확신했는데, 그 감정은 명백히 과장된 것이었다. 겨우 두 번째 만남이었는데! 자기가 사랑의 부적격자임을 뼈저리게 깨달은 한 남자가 스스로에게 사랑의 희극을 연기하면서 빠져들었던 신경질적인 반응은 아니었을까? ...
그는 마당의 더러운 벽면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정신병인지 사랑인지 분간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o 17 -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테레자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 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토마시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4 ]
o 18 - 그녀는 다음 날 저녁 찾아왔다. 기다란 어깨 끈이 달린 핸드백을 메고 있었는데 지난번보다 훨씬 우아해 보였다. 손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였다. ...
o 19 , 20 - ...지금 트렁크가 수화물 보관소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그녀가 자신의 삶을 이 트렁크에 넣어 역에 잠깐 맡겨 두었다가 자기한테 주려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거의 보름 가까이 망설였고 엽서 한 장 보내지 않았던 그가 어떻게 그토록 빨리 결심할 수 있었을까?
그는 스스로도 놀랐다. 그는 자기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첫 번째 부인과 헤어질 때 다른 사람들이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듯 환희의 분위기 속에서 이혼을 치러 냈던 그였다. 그때 그는 자신은 어떤 여자든 간에 한 여자와는 살 수 없고 오로지 독신일 경우에만 자기 자신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그의 집엔 소파도 하나밖에 없었다. 꽤 큰 소파였지만 그는 한 이불 속에 다른 사람과 들어가면 잠들 수 없는 체질이라고 단언하면서 자정 이후에는 모든 여자를 내쫓았다.
o 20 -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 곁에서 잤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직도 그의 손을 잡고 있는 테레자의 모습을 그는 보았다. 그들은 밤새 그렇게 손을 잡고 있었던 걸까?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잠든 그녀는 깊은 숨을 쉬며 그의 손을 잡고 있었고 (하도 단단히 잡고 있어서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엄청나게 무거운 트렁크가 침대 곁에 놓여 있었다.
... 파라오의 딸이 어린 모세가 담긴 바구니를 강물에서 건져 내지 않았다면 구약성서도 없었을 테고, 그러면 우리 문명은 어찌 되었을까! 수많은 고대 신화의 도입부에는 버려진 아기를 구하는 누군가가 있다. 폴리 보스가 아기 오이디푸스를 줍지 않았다면, 소포클레스는 그의 가장 아름다운 비극도 쓰지 않았을 것을!
그 당시 토마시는 은유란 위험한 어떤 것임을 몰랐다. 은유법으로 희롱을 하면 안 된다.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 5 ]
o 22 - 그런데 다른 아이가 아닌 딱히 이 아이에게 그토록 집착할 이유가 있을까? 부주의했던 하룻밤 인연 외에는 그와 아이를 이어 주는 끈은 없는 것이다. 양육비는 꼼꼼하게 챙겨 주겠지만 부성애 같은 이런저런 감정을 내세워 아버지의 권리를 위해 싸우라는 요구까지는 그에게 하지 말았으면!
...
그래서 그는 단시일 내에 부인, 아들, 어머니, 아버지를 성공적으로 떼어 버릴 수 있었다. 그의 몫으로 남은 유일한 상속재산은 여자들에 대한 두려움뿐이었다. 그는 여자를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두려움과 갈망 사이에서 어떤 타협점을 찾아야만 했고 그 타협점을 그는 '에로틱한 우정'이라 불렀다. 그는 애인들에게 이렇게 못을 박았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상대방의 인생과 자유에 대한 독점권을 내세우지 않는, 감상이 배제된 관계만이 두 사람 모두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고.
o 23 - ... 그의 모든 친구들 중 오로지 사비나만이 그를 잘 이해했다. 그녀는 화가였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모든 점에서 키치와는 정반대라서 당신을 사랑하는 거야. 키치의 왕국에서 당신은 괴물이야. 미국 영화나 소련 영화에서 당신 같은 사람은 파렴치한 역할밖에는 할 수 없을 거야."
[ 6 ]
o 24, 25 - 에로틱한 우정의 불문율을 지킨다는 것은 토마시가 자신의 삶에서 사랑을 배제한다는 것도 의미했다. ...
...그는 정사를 마친 직후 혼자 있고 싶다는 억누를 수 없는 욕구를 느꼈던 것이다. 한밤중에 잠에서 깼을 때 옆자리에 낯선 존재가 있다는 것이 불쾌했다. ....
... 나는 그들이 정사를 나누는 목적은 관능성이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잠에 있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테레자는 그가 없으면 잠들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잠에 대해 절대적 권력을 행사했고, 그녀는 토마시가 원하는 순간에 잠들어 버렸다. ...
o 26 - 토마시는 생각했다. 한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것과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거의 상충되는 두 가지 열정이라고.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이 욕망은 수많은 여자에게 적용된다.)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이 욕망은 오로지 한 여자에게만 관련된다.)
[ 7 ] → 테레자의 꿈
o 28, 29 - ... "가, 가란 말이야!" 그런 다음 그녀는 꿈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은 사비나와 함께 어딘가에 있었다. 커다란 방 한가운데 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극장 무대 같았다. 토마시는 그녀에게 한구석에 서 있으라고 명령하더니 그녀 눈앞에서 사비나와 정사를 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영혼의 고통을 육체의 고통으로 억누르기 위해 그녀는 바늘로 손톰 밑을 찔렀다. "끔찍하게 아팠어!" 그녀는 실제로 손에 고통이 느껴지는 것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
... 그는 그녀가 사비나의 화실 벽 뒤에 숨어서 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는 모습을 그녀에게서 보았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잡아 쓰다듬고 입가로 가져가 마치 핏자국이 남은 듯 손가락을 핥아 주었다.
o 30 - ... 토마시는 춤추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병원 동료 중 하나가 테레자와 춤을 췄다. ...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순순히 파트너의 뜻에 따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는 기가 막혔다. 그녀의 헌신, 토마시의 눈빛을 읽고 그의 뜻에 따르려는 그녀의 뜨거운 욕망이 딱히 토마시라는 한 남자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만난 어떤 남자의 요구에도 기꺼이 응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 댄스 장면이 강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
o 31 - 이론적 가능성에서 비롯된 터무니없는 질투는 토마시가 그녀의 정절을 불가결한 전제 조건으로 간주한다는 증거였다. ...
[ 8 ]
o 32 - 그녀의 꿈은 변주곡의 테마나 텔레비전 연속극처럼 반복되었다. 예를 들면 그녀는 고양이가 얼굴에 뛰어올라 피부 깊숙이 발톱을 박는 꿈을 자주 꿨다. 사실 이 꿈은 쉽게 풀이될 수 있다. 체코 말로 고양이는 예쁜 여자를 지칭하는 속어다. 테레자는 여자들, 모든 여자들로부터 위협을 받는다고 느꼈다. 모든 여자는 토마시의 잠재적 애인이었고, 그녀는 그것이 두려웠다.
o 33 - ... 그녀는 꿈 이야기를 했다. "커다란 실내 수영장이었어. 여자만 스무여 명 있었어. 모두 완전히 알몸이었고 수영장 주변을 따라 발을 맞춰 행진해야 했어. 천장에 커다란 바구니가 매달려 있었고, 그 안에 한 남자가 있더군. 챙이 큰 모자를 써서 얼굴을 가렸지만 나는 그 남자가 당신인 걸 알았어. 당신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더군. 당신은 악을 썼어. 우리는 행진하며 노래를 부르다가 무릎을 꿇어야만 했어. 한 여자가 무릎을 꿇지 못하자 당신은 권총으로 쏘았고, 그녀는 죽어 수영장에 떨어졌지. 그 순간 다른 여자들은 박장대소하고 더욱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당신은 우리로부터 눈을 떼지 않다가 우리 중 한 여자가 틀린 동작을 하면 쏘아 죽였어. 풀장은 물결에 따라 출렁이는 시체로 가득 찼고, 나는 더 이상 힘이 없어서 다음 동작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당신이 날 죽일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o 34, 35 - 이어지는 세 번째 꿈은 죽고 난 후의 일과 관련 있었다. 그녀는 이삿짐 트럭만큼이나 큰 영구차 속에 누워 있었다. 주위에는 오로지 여자 시체들뿐이었다. 시체가 너무 많아 뒷문을 열어 놓고 다리를 밖으로 내놓아야 했다.
테레자는 악을 썼다. "이봐요! 난 죽지 않았어요! 아직도 감각이 있단 말이예요!"
"우리도 감각이 남아 있어."라고 다른 시체들이 빈정거렸다. 예전에 살아있는 여자들이 자기들은 이가 썩고 난소가 병들고 주름살이 생겼으니 언젠가는 테레자도 이가 썩고 난소가 병들고 주름살이 생기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하면서 킬킬 웃은 적이 있었는데, 시체들은 그 여자들과 똑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똑같은 웃음을 지으며 이제 너도 죽었으니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갑자기 그녀는 오줌을 누고 싶었다. 그녀는 소리쳤다. "난 오줌을 누고 싶단 말이에요! 이게 내가 죽지 않았다는 증거예요!"
시체들은 다시금 폭소를 터뜨렸다. "오줌 누고 싶은 게 당연하지! 모든 감각이 오래도록 남아 있을 거야! 한쪽 팔을 잘라낸 후에도 오랫동안 팔이 있는 것처럼 느끼듯 말이야. 오줌은 더 이상 없지만 우리도 여전히 오줌을 누고 싶거든."
테레자는 침대 안에서 토마시를 꼭 껴안았다. "그런데 그 여자들이 하나같이 나를 예전부터 알았다는 듯이, 내 친구라도 되는 듯이 내게 반말을 했고, 나는 그녀들과 영원히 같이 있어야만 할까 봐 두려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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