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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1부 가벼움과 무거움 [ 9 ~11 ]

조앤디디온 2019. 5. 26. 01:28



[ 9 ]

o 35, 36 - 라틴어에서 파생된 모든 언어에서 동정(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접두사 '콤(com-)'과 원래 '고통'을 의미하는 어간 '파시오(passio)'로 구성된다. 다른 언어, 예컨대 체코어, 폴란드어, 독일어, 스웨덴어에서 이 단어는 똑같은 뜻의 접두사와 '감정(sentiment)'이라는 단어로 구성된 명사로 번역된다(체코어로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에서 동정이라는 단어는 타인의 고통을 차마 차가운 심장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고통스러워하는 이와 공감한다는 뜻이다. 거의 같은 뜻을 지닌 연민(pitie)이라는 단어는(영어로 pity, 이탈리아어로 ... 등) 고통받는 존재에 대한 일종의 관용을 암시한다. 한 여인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것은 그녀보다 넉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몸을 낮춰 그녀의 높이까지 내려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동정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의심쩍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사랑과는 별로 관계없는 저급한 감정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동정 삼아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은 타인의 불행을 함께 겪을 뿐 아니라 환희, 고통, 행복, 고민과 같은 다른 모든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동정은 고도의 감정적 상상력, 감정적 텔레파시 기술을 지칭한다. 감정의 여러 단계 중에서 이것이 가장 최상의 감정이다.


o 36, 37 - 테레자가 바늘로 손톱 밑을 찌르는 꿈을 꾼다는 것은 그녀가 토마시 모르게 그의 서랍을 뒤졌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결국 자신의 본심을 표현한 것이다. 다른 여자가 이런 짓을 했다면 그 후로 그는 두 번 다시 말도 걸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그는 그녀를 내쫓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녀의 손을 잡고 손끝에 키스까지 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마치 테레자 손가락의 신경이 자신의 뇌에 직접 연결된 듯 그녀가 손톱에서 느끼는 고통을 자신도 느꼈기 때문이다. ... 그러나 토마시는 동정이 그의 운명(혹은 저주)이 되었기에 서랍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으로 쓴 사비나의 편지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인 것처럼 느꼈다. 그는 테레자를 이해했고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더욱 더 사랑하게 되었다.


[ 10 ]

o 38, 39 - 뭐라고! 에로틱한 우정을 포기할 수 없다고? 그렇다. 그것이 없으면 그의 가슴은 찢어질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여자에 대한 탐욕을 자제할 힘이 없다. 그리고 그는 자제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바람기가 테레자에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토마시였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자제하고 살 것인가? 그것은 축구 경기 관람을 포기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외도 속에 여전히 쾌감이 있었을까? ... 테레자를 알고부터 술의 도움 없이는 다른 여자들과 사랑을 나눌 수 없었다! 그런데 입가에서 풍기는 술 냄새야말로 테레자가 가장 쉽사리 그의 바람을 눈치채는 단서였다.

이제 그는 덫에 걸려든 것이다.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가려고 문을 나서면 욕망이 사라졌고 여자들이 없는 날이면 대번에 전화를 걸어 밀회 약속을 했다. 그가 그나마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곳이 사비나의 집이었다. ...


o 39 - 사비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보고 있자니 당신이 내 그림의 영원한 테마 속에 녹아드는 중이란 느낌이 들어. 두 세계의 만남이라는 테마. 이중노출이랄까? 바람둥이 토마시의 그림자 뒤에 낭만적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이 나타나거든.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어. 오직 테레자만을 생각하는 트리스탄의 모습에서 바람둥이의 아름다운 세계가 언뜻 엿보이기도 하고."


o 40 - "뭘 찾는 거야?" "양말 한 짝." 그녀는 그와 함께 방을 뒤졌다. 그는 다시 엉금엉금 기며 탁자 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거기엔 양말이 없어. 올 때부터 맨발이었을 거야." 토마시는 손목시계를 보며 소리쳤다. "아니, 안 신고 왔다고! 한 짝만 신고 왔을 리가 없어!" ....

그는 이것이 보복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정사 중에 시계를 본 것에 앙갚음을 하려고 양말을 감춘 것이다. 그는 한쪽 발에는 양말, 다른 쪽 발에는 발목까지 말려 내려온 하얀색 여자 스타킹을 신고 집에 돌아갔다.

그는 출구가 없는 상황에 빠져 있었다. 애인들 눈에 그는 테레자에 대한 사랑의 도장이 찍힌 사람으로 보였고, 반면 테레자의 눈에는 여러 애인들과 나눈 사랑 편력의 도장이 찍힌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 11 ] → 카레닌의 등장

o 41 - 테레자의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그는 그녀와 결혼했고 (...) 그녀에게 작은 강아지를 사 주었다.

어미는 토마시 친구의 개로 세인트버나드 종이었다. 아비는 옆집의 울프 종이었다. 아무도 그 배에서 태어난 잡종 새끼를 원치 않았고, 그의 친구는 새끼를 모두 죽여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울적해하고 있었다.

토마시는 그 새끼들 중 하나를 골라야만 했고 그이 선택을 받지 못한 개는 죽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 결국 몸통은 늑대를 닮고, 머리는 어미 개 세인트버나드를 닮은 암캐로 골랐다. 그는 개를 테레자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녀는 강아지를 껴안고 가슴에 비볐고, 강아지는 곧바로 그녀의 블라우스에 오줌을 쌌다.


o 42 - 이제는 이름을 지어 줘야 했다. 그는 듣기만 해도 테레자의 개임을 알 수 있는 이름을 지어 주고 싶었고 그녀가 예고 없이 프라하에 찾아왔던 그날,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책이 떠올랐다. 그는 강아지를 톨스토이라고 부르자고 했다. 테레자가 반박했다.

... "... 안나 카레니나라고 부를 순 없지. 차라리 그냥 카레닌이라고 부르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딱 맞아떨어지는 이름이네." ...

그러나 카레닌의 도움에도 그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소련 탱크가 전국을 점령하고 열흘이 지난 후에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