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
o 42 - ... 1968년 8월, 국제 학술대회에서 만났던 취리히 병원 원장이 매일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토마시를 염려하며 취리히의 의사 자리를 제안했다.
[ 12 ]
o 43 - 토마시가 스위스 의사의 제안을 망설임 없이 거절했던 것은 테레자 때문이었다. 그녀가 떠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더구나 소련군이 진주한 후 일주일 동안 그녀는 거의 행복과 유사한 일종의 전율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섰고 외국 기자들에게 필름을 나누어 줬다. 기자들은 필름을 얻으려고 아우성을 쳤다. 어느 날 그녀는 너무 대담해져서 시위 군중에게 권총을 겨누는 한 장교의 사진을 가까이에서 찍었다. 그녀는 체포되어 소련군 본주에서 밤을 샜다. 소련군은 그녀를 총살하겠다고 위협했지만 그녀는 석방되자마자 거리로 돌아가 사진을 찍었다.
o 44 - "둡체크가 돌아온 후부터 모든 게 변했어."라고 테레자가 말했다.
사실이었다. 국민들의 행복한 도취는 점령 후 일주일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체코 정치인들은 잡범처럼 소련군에게 끌려갔고,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안위를 걱정했고, 소련군에 대한 증오는 술기운처럼 치밀어 올랐다. 증오감에 도취된 축제였다. ... 그러나 어떤 축제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
o 44, 5 - ... 둡체크는 이 타협안을 가지고 프라하로 돌아와 라디오 방송에서 연설문을 낭독했다. 구금 생활 엿새 동안 너무도 쇠약해진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다가 말을 더듬었다. ...
그의 타협안은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해 마지 않던 학살과 시베리아 집단 유배 같은 최악의 상황으로부터 국가를 구해내기는 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보헤미아는 정복자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다. 알렉산드르 둡체크처럼 영원히 말을 더듬고, 횡설수설하고, 호흡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일상적 모욕 상태로 돌입한 것이다.
o 45 - 그녀는 목숨을 걸고 거리에서 소련군 사진을 찍으며 그녀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끽했다. 그동안만은 연속극처럼 계속되었던 그녀의 꿈이 중단되어 그녀는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 축제가 끝난 지금, 그녀는 다시 그녀의 밤이 두려워졌고 밤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
"사비나도 스위스로 망명했는데 그래도 괜찮아?"
"제네바가 취리히는 아니잖아. 분명히 프라하에서보단 그녀가 덜 거슬릴거야."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테레자의 망명 욕구를 토마시는 죄인이 유죄 선고를 받듯 받아들였다. 그는 그 선고에 따라 얼마 후 테레자, 카레닌과 함께 스위스의 가장 큰 도시에 있게 되었다.
[ 13 ]
o 46 - 그는 제네바에 있는 사비나에게 몇 차례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운 좋게도 소련군이 침공하기 여드레 전 개인전을 개최했고, 약소국가에 대한 동정심에 이끌린 스위스의 미술 애호가들이 그녀의 그림을 몽땅 구입해 줬다.
"소련군 덕분에 난 부자가 됐어!"
o 47,8 - 호텔을 나와 취리히의 집(테이블, 의자, 소파, 양탄자를 들여놓은 것도 오래전 일이다.)으로 돌아가면서 토마시는 달팽이가 자신의 집을 메고 다니듯 자기도 자신의 삶의 방식을 휴대하고 다닌다는 생각을 하며 행복을 느꼈다. 테레자와 사비나는 그의 삶에 있어서 두 극점, 서로 멀리 떨어져 화해가 불가능하지만 하나같이 아름다운 극점을 표상했다.
...
그가 저녁 늦게 돌아와 테이블 위에서 펴지를 발견한 것은 취리히에 온 지 육 개월 혹은 칠 개월쯤 지난 때였다. 그녀가 프라하로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 외국에서 살 자신이 없기에 떠난다는 것이다. .. 소련군 침공 기간 동안 자신이 겪었던 체험 덕분에 자기가 더 이상 소심하지 않고 이제는 어른스럽고 합리적이며 용감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을 과대평가했다고 했다. 그녀는 토마시에게 짐이 되었고,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너무 늦기 전에 결론을 맺고자 했다. 그리고 카레닌을 데리고 가니 양해해 달라고 했다.
o 48 - ... 보헤미아와 나머지 세계 사이의 경계는 그들이 떠나왔던 시절처럼 더 이상 열려 있지 않다. 전보도 전화도 테레자를 돌아오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정부 당국은 그녀가 떠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지만 테레자가 떠난 것은 돌이킬 수 없었다.
[ 14 ]
o 49 - ... 건너편 건물 벽을 바라보며 자신이 그녀와 함께 살고 싶은 것일까 아닐까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테레자가 모든 것을 결정해주었다.
... 그는 그녀와 함께 보낸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았고 그들의 관계가 이보다 더 잘 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꾸며낸 이야기일지라도 달리 마무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 테레자는 예고도 없이 그의 집에 찾아왔다. 어느 날 그녀는 같은 방식으로 떠났다. 그녀는 묵직한 트렁크를 들고 왔다. 그리고 다시 묵직한 트렁크를 들고 떠났다.
o 50 - ... 테레자와 함께 산 칠 년이라는 세월은 이제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이미 추억이 된 그 시절이 당시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와 테레자의 사랑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피곤하기도 했다. 항상 뭔가 숨기고, 감추고, 위장하고, 보완하고,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하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질투심과 고통과 꿈에서 비롯된 비난을 감수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자신을 정당화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이제 피곤은 사라지고 아름다움만 남았다.
... 그는 오로지 독신으로만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 수 있으니 자신의 운명은 그런 것이라고 굳게 확신했던 삶, 독신자의 삶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 15 ]
o 52 - 우수 어린 이 이상한 도취는 일요일 저녁까지 지속되었다.
월요일, 모든 것이 달라졌다. 테레자가 그의 머릿속에 돌연 출연한 것이다. 그는 테레자가 이별의 편지를 쓰며 겪었던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그녀의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 손에는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다른 손에는 카레닌을 묶은 줄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프라하 아파트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리는 그녀 모습이 떠올랐고 문을 열었을 때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홀로 된 그녀의 슬픔이 그의 가슴에 와 닿았다.
o 53 - ... 생각하지 마라! 생각하지 마라! 난 동정심이라는 병을 앓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떠나서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가 아니라 동정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전에는 몰랐지만 그녀가 병균을 주입한 이 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 수천 톤이나 나가는 소련 탱크의 무게도 이 중압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동정심보다 무거운 것은 없다. 우리 자신의 고통조차도, 상상력으로 증폭되고 수천 번 메아리치면서 깊어진,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해, 타인을 대신해 느끼는 고통만큼 무겁지는 않다.
... 동정심은 자기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은근히 고집을 꺾지 않아서 결국은 테레자가 떠난 지 닷새 후 원장(소련군 침공 때 매일 프라하로 전화를 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에게 당장 돌아가야만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부끄러웠다. 무책임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라고 원장이 생각할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
o 55 - 원장은 정말 화를 냈다. 토마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Es muss sein. Es muss sein."
그것은 하나의 암시였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 중 마지막 악장은 이 같은 두 모티프로 작곡되었다.
"Muss es sein?" "Es muss sein!" "Es muss sein!"
이 단어의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게 하기 위해 베토벤은 마지막 악장 첫 부분에 이렇게 써넣었다. "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 신중하게 내린 결정.
베토벤에 대한 암시를 통해 토마시는 벌써 테레자 곁에 가 있었다. 베토벤의 4중주와 소나타의 레코드를 사라고 그를 억지로 몰아붙인 사람이 그녀였기 때문이다. 원장이 음악 애호가였기 때문에 이 암시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정곡을 찔렀다. 원장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베토벤의 멜로디를 흉내내며 부드럽게 말했다. "Muss es sein?" 그래야만 하는가?
토마시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네, 그래야만 합니다!" Ja, es muss sein!
[ 16 ]
o 55 - 파르메니데스와는 달리 베토벤은 무거움을 뭔가 긍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 진중하게 내린 결정은 운명의 목소리와 결부되었다.(es muss sein!) 무거움, 필연성 그리고 가치는 내면적으로 연결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진중한 것이고,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베토벤의 음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작곡가 자신보다는 베토벤의 해설가에게 돌리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아니면 그럴 만한 개연성이 있겠지만) 우리는 오늘날 이런 신념에 어느 정도 동조한다. 우리 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어깨에 하늘을 지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베토벤의 영웅은 형이상학적인 무게를 들어올리는 역도 선수다.
o 55, 6 - 토마시는 스위스 국경을 향해 차를 몰았고, ...
그러나 잠시 후 체코 국경을 넘자 그는 소련 탱크 행렬과 마주쳤다. ... 검은 군복을 입은 흉측한 전차병이 사거리에 자리를 잡고 보헤미아의 모든 도로가 자기 것이라는 듯 교통을 정리했다. 토마시는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라고 되뇌었지만 금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그래야만 할까?
...
어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물리 실험 시간에 중학생은 과학적 과정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한 번밖에 살지 못하므로 체험으로 가정을 확인해 볼 길이 없고, 따라서 자기 감정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o 56 - ... 테레자의 품 안에 뛰어들고 싶은 욕망(취리히에서 자동차에 올라타는 순간까지도 느꼈던 이 욕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은 눈 덮인 들판 한가운데서 마주 보고 서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추위에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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