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글, 시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1부 가벼움과 무거움 [ 17 ]

조앤디디온 2019. 6. 4. 03:59



[ 17 ]    토마시와 테레자의 만남, 사랑 그리고 우연

o 57 - 잠든 테레자 곁에서 뒤척이다가 몇 년 전 그녀가 무심코 던진 말이 떠올랐다. ...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틀림없이 그를 사랑했을 거야."

... 테레자가 그의 친구 Z가 아닌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가능성의 왕국에는 토마시와 이루어진 사랑 외에도 실현되지 않은 다른 남자와의 무수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o 57, 8 -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덥수룩한 머리가 끔찍한, 침울한 베토벤도 몸소 그의 'Es muss sein!'을 우리의 위대한 사랑을 위해 연주했다고 확신한다.

토마시는 그의 친구 Z에 대해 테레자가 한 말을 떠올리고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Es muss sein!'이라기보다는 'Es konnte auch anders sein.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o 58 - 칠 년 전 테레자가 살던 도시의 병원에 우연히 치료하기 힘든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토마시가 일하던 병원의 과장이 급히 호출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과장은 좌골 신경통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대신 토마시를 시골 마을에 보냈던 것이다. 그 마을에는 호텔이 다섯 개 있었는데, 토마시는 우연히 테레자가 일하던 호텔에 들었다. 우연히 열차가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그는 술집에 들어가 앉았던 것이다. 테레자가 우연히 당번이었고 우연히 토마시의 테이블을 담당했다. 따라서 토마시를 테레자에게 데려가기 위해 여섯 우연이 연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했고,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테레자에게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녀 때문에 보헤미아로 되돌아왔다. 이렇듯 치명적 결정은 칠 년 전 외과 과장에게 좌골 신경통이 없었더라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우연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절대적 우연의 화신인 그 여자가 지금 그의 곁에 누워 깊은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다.


o 58, 9 - 아주 늦은 시간이었다. 절망의 순간에 항상 그랬듯 토마시는 위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테레자의 호흡이 한두 번인가 가벼운 코 고는 소리로 변햇다. 토마시는 추호도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느낀 유일한 것은 위를 누르는 압박감, 귀향으로 인한 절망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