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
o 84 - 집을 뛰쳐나와 운명을 바꿀 용기를 테레자에게 주었던 것은 마지막 순간 그가 그녀에게 내밀었던 이 명함보다는 우연(책, 베토벤, 6이라는 숫자, 광장의 노란 벤치)의 부름이었다. 그녀의 사랑에 발동을 걸고, 끝나는 날까지 그녀에게 힘을 준 에너지의 원천은 아마도 이런 몇몇 우연들일 것이다.(이런 하찮은 도시에 걸맞게 변변치 않고 진부하긴 하지만.)
o 84, 5 - 우리의 일상적 삶에는 우연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소위 우연의 일치라고 부르는, 사람과 사건 간의 우연한 만남들이 일어난다.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순간 토마시가 술집에 등장하는 것처럼. 이러한 엄청나게 많은 우연의 일치를 우리는 대개 완전히 무심결에 지나쳐 버린다. 토마시 대신에 동네 푸줏간 주인이 테이블에 앉았다면 테레자는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것에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다.(베토벤과 푸줏간 주인의 만남 역시도 기묘한 우연의 일치지만.) 그러나 막 싹트는 사랑은 그녀의 미적 감각의 날을 날카롭게 세웠다. 그녀는 그 음악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매번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녀는 감격할 것이다. 그 순간 그녀 주변에서 일어날 모든 일은 그 음악의 찬란한 빛에 물들어 아름다울 것이다.
o 85 - 그녀가 토마시의 아파트로 오던 날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던 소설 첫머리에서 안나는 브론스키를 이상한 상황에서 만난다. 그들은 방금 누군가가 열차에 치여 죽었던 역의 플랫폼에 있었다. 소설 끝에서 열차 아래로 몸을 던지는 사람은 바로 안나다. 처음과 끝에 동일한 테마가 등장하는 이러한 대칭 구성은 대단히 '소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물론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소설적이라는 말이 '꾸며 낸', '인공적인', '삶과는 유사성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란 이런 식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안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과 죽음의 테마, 사랑의 탄생과 결부되어 잊을 수 없는 이 테마가 그 음울한 아름다움으로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o 86 -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잔의 만남 같은 것)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 12 ]
o 88 - 다음 날 아침 수화물 보관소에 짐을 맡긴 뒤 『안나 카레니나』를 겨드랑이에 끼고 프라하의 거리를 쏘다녔다. 저녁에 그녀가 초인종을 눌렀고, 그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책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토마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인 양. 자기가 가진 통행증이라곤 이 비참한 입장권밖에 없음을 깨달은 그녀는 울고 싶어졌다. ...
[ 13 ]
o 89 - ... 그 비명은 관능의 표현이 아니었다. 관능이란 감각을 최대한 동원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열정적으로 관찰하며 조그만 소리까지 듣는 상태다. 그러나 테레자의 비명은 감각을 마비시켜 보고 듣는 것을 차단하려 드는 것 같았다. 그녀 내면에서 악을 쓰는 것은, 모든 모순을 소거하고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도 소거하며 심지어 시간까지도 소거하기를 원하는 그녀 사랑의 순박한 이상주의였다.
o 89, 90 - 토마시 곁에서 잠든 그녀는 밤새도록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미 여덟 살 때부터 사랑했던 남자의 손, 천생연분인 남자의 손이라고 상상하며 한 손으로 다른 손을 꼭 쥐고 잠들었다. ...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준비하고 단련했던 것이다.
[ 14 ]
o 91 - ... 테레자는 그들보다 많이 읽었고 그들보다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 독학자와 학교에 다닌 사람의 다른 점은 지식 폭이 아니라 생명력과 자신에 대한 신뢰감의 정도 차이다. 삶에 몰두하는 테레자의 정열은 프라하에서는 탐욕스럽고 동시에 깨지기 쉬웠다. ... 삶에 대한 그녀의 모든 갈망은 실낱같은 하나의 끈에 매달려 있었다. 바로, 테레자의 내장 속에 수줍게 숨어 있던 영혼을 높이 떠오르게 한 토마시의 목소리였다.
o 92 - "나 때문에 질투한 게 사실이야?" 그녀는 마치 노벨상 수상자로 지목되었으나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사람처럼 수십 번 같은 질문을 했다.
그녀는 그를 끌어안고 방 안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
불행히도 머지않아 질투심을 갖게 된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토마시에게 그녀의 질투심은 노벨상이 아니라, 죽기 전 겨우 한두 해 정도만 벗어날 수 있었던 짐이었다.
[ 15 ]
o 93,4 - 나는 다시 한 번 이 꿈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공포심은 토마시가 첫 번째 방아쇠를 당길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악몽이었다. 다른 알몸 여자들 틈에 끼여 발을 맞추어 행진한다는 것은 테레자에게 가장 일차적인 공포의 이미지였다. 그견가 어머니 집에 살던 시절 욕실을 잠그는 것은 금지였다. 그 점에 대해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네 몸도 다른 사람의 몸과 다를 바 없다. 너에겐 수줍어 할 권리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감출 이유가 없다. 어머니의 세계에서 모든 육체는 같은 것이며 줄줄이 발을 맞춰 행진하는 형상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테레자에게 있어서 나체는 집단 수용소에서 강요하는 획일성의 상징이었다.
o 94,5 - 하지만 토마시가 그들을 총으로 죽이는 것과 그들이 차례로 죽어 수영장에 빠지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철저하게 비슷하고 무차별화된 것을 즐거워하는 여자들은 그들의 유사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미래의 죽음을 축하하는 것이다. 권총 소리는 죽음의 행진을 행복하게 마무리할 따름인 셈이다. ...
그런데 왜 총을 쏘는 사람이 토마시였고, 왜 그는 테레자를 쏘려고 했을까?
테레자를 여자들 가운데로 보낸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테레자는 자신이 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꿈을 통해 토마시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녀는 모든 육체가 평등했던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와 함께 살러 온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와 함께 산 것이다. 그런데 이제 토마시 역시 그녀와 다른 여자들 사이에 평등의 선을 그었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모든 여자에게 키스했고 같은 식으로 애무했으며 테레자의 육체와 어떤 구별도, 정말 추호의 구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벗어났다고 믿었던 세계로 그녀를 되돌려 보낸 셈이다. 그는 다른 벌거벗은 여자들과 함께 행진하라고 그녀를 내몰았던 것이다.
[ 16 ]
o 96 - 그녀는 번갈아 가며 세 가지 꿈을 꾸었다. 고양이로부터 학대받는 첫 번째 꿈은 그녀가 받는 고통을 설명하는 꿈이다. 두 번째 꿈은 수많은 변형된 이미지를 통해 학대 장면을 보여 준다. 세 번째 꿈은 자신의 모욕이 영원히 지속되는 저세상을 말해 준다.
이 꿈들에서 해몽거리란 하나도 없다. 꿈이 토마시에게 가하는 비난이 너무 명백해서, 그는 그저 침묵하고 고개 숙여 테레자의 손을 애무하는 수밖에 없다.
o 97 - 그녀는 사랑 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곧 다가올 밤이 무섭고 그러한 꿈들이 두려웠다. 그녀의 삶은 둘로 갈려 있었다. 밤과 낮이 서로 그녀를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었다.
[ 17 ]
o 98,9 - ...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수영장을 둘러싼 나체 여자들의 행진, 테레자도 그들처럼 죽었다며 기뻐해 마지않는 영구차 속 시체들, 그것은 그녀를 공포로 몰아넣는 '저기 아래'인 셈이며 한번 빠져나갔다가도 신비스럽게 이끌리는 그런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현기증이다. 그녀는 운명과 영혼을 포기하라고 속삭이는 아주 부드러운 (거의 쾌활하기까지 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영혼 없는 사람들과의 유대성에 대한 호출이었으며,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 그녀는 그 부름에 답하여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싶은 욕구도 느꼈다. 어머니의 친구들 사이에 끼여 앉아 그들 중 누가 요란한 방귀를 뀌면 웃고, 수영장 주위를 나체로 행진하며 노래하고 싶어졌다. ...
[ 18 ]
o 100 - ... 그러나 어머니는 불쌍한 사람이었으며 테레자가 그녀와 불행한 사랑에 빠져 있었다는 점도 잊지 말자. ....
... 테레자는 이십 년 동안 동경했던 모성애의 목소리를 마침내 듣는다고 믿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이 허약하게 느껴지길 바랐다. 토마시의 바람기에 돌연 자신의 무력함이 드러났고 이 무력감으로부터 현기증, 엄청난 추락 욕구가 생긴 것이다.
o 101,2 - ... 그녀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위해 어머니를 배신한 것에 대해 자책했다. ... 이제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같은 처지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테레자가 토마시를 사랑하듯 남편을 사랑했고 테레자가 토마시의 바람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듯 두 번째 남편의 바람기로 괴로워했던 것이다. ...
...
테레자를 어머니 곁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현기증임을 짐작한 토마시는 그 여행을 원치 않았다. ...
테레자는 토마시의 말을 듣고 어머니를 보러 가지 않았다. 바로 그날 테레자는 길거리에서 넘어졌다. ...
그녀는 참기 어려운 추락 욕구를 느꼈다. 그녀는 지속적인 현기증 속에서 살았다.
넘어지는 사람은 "날 좀 일으켜 줘!"라고 말한다. 토마시는 변함없이 그녀를 일으켜 줬다.
[ 19 ]
o 103,4 - "마치 무대 위에서처럼 내 화실에서 당신과 정사를 나누고 싶어. 주위에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접근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겠지."
...
두 사람은 포옹했고, 그녀는 그에게 속삭였다. "당신을 위해 내가 그들의 옷을 벗겨 주고, 욕조에서 씻겨 주고, 당신에게 데려다 줄게." 그녀는 두 사람이 양성을 지닌 육체로 변하고 다른 여자들의 육체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장난감이 되길 바랐다.
[ 20 ]
o 105 - 일부다처주의 생활에서 그의 분신이 되어 주겠다는 것. 토마시는 그것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어서 사비나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다. 그녀는 사비나에게 인물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 테레자는 마침내 한가운데에 연단처럼 우뚝 솟은 커다란 소파가 있는 큰 방을 볼 수 있었다.
o 106 - 그녀는 말을 멈추더니 다시 덧붙였다.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였지."
... 그녀는 사비나의 모든 작품이 예나 지금이나 실은 항상 같은 것을 말하며 두 주제, 두 세계의 동시적 만남이자 마치 이중노출로 탄생한 사진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 풍경, 그리고 뒤에서 투명하게 비치는 불 켜진 머리맡 램프. 사과와 호두와 불 켜진 크리스마스 트리가 그려진 서정적 정물화 너머로 그것을 찢는 손.
그녀는 갑자기 사비나에게 존경심을 느꼈다. 그리고 예술가 사비나가 매우 친근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두려움이나 불신이 섞이지 않은 이 존경심은 호감으로 변했다.
107 - ... 그림에서 눈길을 떼자 방 한가운데 연단처럼 우뚝 솟은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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