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글, 시

건축가 승효상 [묵상]

조앤디디온 2020. 1. 6. 15:23

 

 

 

[제1일] -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o 20.21 - 수도사들이 일상의 공간을 떠나 굳이 광야나 산속으로 들어가 밀폐된 공간을 찾는 까닭을 살피고 그들의 영성으로 충만한 공간을 탐문하는 일은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을 반추하여 성찰하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o 22,23 - 우리가 현실에 살면서 얻는 정보나 지식으로 나도 모르게 어떤 사물이나 장소에 대해 환상을 쌓게 되는데, 그 환상은 부서지기 쉬운 달걀 껍데기 같아 힘이 없다. 심지어 우리의 삶을 허위로 내몰 위험도 있다. 믿건대, 힘은 진실로부터 나오며 진실은 늘 현장에 있어, 현장에 가는 일인 여행은 그 장소가 가진 진실을 목도하게 하여 결국 우리에게 현실로 돌아가 일상을 다시 시작할 힘을 얻게 한다. 적어도 나에게 이 말은 항상 사실이었다.

 

[제2일] - 청빈과 순결 그리고 순종

o 40.41 - 순교라는 것. 예수의 죽음을 좇아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어준 이들의 믿음, 혹은 그럴 기회가 없어 차라리 일상에서의 죽음을 택해 세상 밖으로 길을 떠난 이들의 믿음. 그게 무엇일까...

o 42.43 - ... 산속 높은 지대에 있는 오래된 마을 하나가 눈길을 끈다. ... 저렇게 늘 조망하는 삶을 일생으로 가지면 어떻게 될까? ... 체념은 평화와 행복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라 했던가... 세상의 끝 어딘가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신을 찾아 끝까지 간 흔적이다. 세상과 완전히 결별한 삶을 살고자 한 절박함 아니면 도무지 이 벼랑에 발을 디딜 수 없다.

o 46.47 - 그 절박함으로 지은 수도원은 마치 수직 같은 벼랑이 땅이며 건축은 거기에서 튀어나온 듯했다. 험하고도 험한 이곳을 굳이 찾은 베네딕토의 절박함은 무엇 때문일까?

o 50.51 - 공부할수록 더 많은 연구 과제가 나와 골치 아프다고도 했지만, 그는 공부를 즐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

o 54.55 - 여행을 많이 한 이는 보편성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커지기 마련이며 나름대로의 이상적 세계를 꿈꾸게 된다.

o 56.57 - 그러나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동의어처럼 여겨진 이 도시는 그의 죽음으로 생명을 멈추게 되었고 야만족의 침탈까지 더해져 아름다운 도시는 파괴되고 몰락하여 오늘날의 폐허에 이른다.

풍경을 주제로 많은 글을 쓴 존B.잭슨 John B. Jackson(1909~1996)은 『폐허의 필요성』The Necessity for Ruins(1980)에서 폐허는 원형으로 돌아가기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고 말하며, 역사는 중단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했다. 세운 자의 영광을 영원히 기리고자 아무리 튼튼하게 지었다 해도, 도시와 건축이 반드시 무너진다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돌 더미의 폐허에 서면, 원래 모습을 상상으로 복원하고 그 속에 있었던 삶들을 추론하는 일이 흥미진진하지만 그 일의 끝에는 늘 허무가 기다리고 있다. 건축과 도시는 사라지는 숙명을 피할 길이 없으며 남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거기에 있었다는 기억뿐이라는 것. 이 사실만이 진실이다. 앞으로 이 기행에서 만날 무수한 폐허의 풍경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런 불가항력에 대한 순종이 아닐까?

 

[제3일] - 명료함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없다.

o 60.61. - 내게 교회 마당은 놀이터였고 교회 골방은 공부방이었다. 찬송과 기도 소리는 늘 내 몸 안팎에 머물렀다. 기독교와 교회는 그냥 내게 주어진 환경이었다. 그러니 이 종교를 나 스스로 가진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중학교 시절부터 격심하게 정신적으로 방황했다. 신이란 무엇이고 내가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지, 어린 가슴에 끊임없는 질문이 솟았다. ...

 

o 66.67 - 하드리아누스는 팍스 로마나 Pax Romana, 즉 '로마에 의한 평화'를 실천하고자 여행을 통해 보편성과 포용성의 가치를 익힌 황제인 까닭에 신전마저 하나의 신이 아니라 모든 신을 모시도록 지어 '판-테-온' Pan-The-On이라 했으니 한자어로는 범신전(汎神殿)이 딱 맞는 말이다.

이 건물은 콘크리트로 지어졌다. 콘크리트는 로마인이 발명한 재료다. 흙, 나무, 돌 같은 자연 소재로만 집을 짓던 만년의 건축 역사를 로마인이 콘크리트를 발명하면서 혁명적으로 뒤바꾼 것이다. 내가 판단하건대 이 일은 건축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획기적 사건이었다. 어떠한 형태를 상상하며 설계하든 나무로 거푸집을 짜서 이어 붙인 후 석회.자갈.모래.물을 배합한 콘크리트를 부으면 한꺼번에 전체가 완성되는 경이적 방식은 나무와 돌이 가질 수밖에 없는 크기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혁신적 기술이었고, 요즘 말로 하면 하이테크 중의 하이테크였다. 이로써 우리의 문명과 삶이 얼마나 혁신되었는지 모른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판테온 건축을 설명할 때 중요하게 등장하는 치수가 있다. 43.2미터라는 치수. ... 북극점에서 적도까지의 길이를 천만으로 나눠 1미터라는 단위를 정한 미터법, 우리 인체와 무관한 이 계량법이 나타나기 훨씬 전에 이 건축을 수치로 이야기하자면 완전수의 일종인 '12×12'로 표기했을 게다. ... 헬레니즘 Hellenism 문화에 깊이 빠진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12는 매혹적인 수치일 수밖에 없었다. 이 수치를 바탕으로 크기를 정한 반구가 만드는 지붕과, 이와 같은 수치를 지닌 바닥에서 천창까지의 높이는 이 건축의 완전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특히 격자로 구성된 돔의 패턴은 장식이 아니라 구조의 원칙이 형태로 나타난 것이어서 모자람이나 더함이 없이 또한 완전하다.

 

o 70.71 - 돔 가운데 부분을 원형으로 뚫어 대기를 순환시켜 내부 공기를 맑게 하는 오쿨루스는 이 건축가가 콘크리트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했을 뿐 아니라 공기 대류의 원리까지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건축은 명료하다. 폴 발레리 Paul Valery(1871~1945)가 말했던가.

개념적으로 이 원형의 오쿨루스는 마치 하늘과 소통하는 건축의 영혼인듯.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숨 막히는 감동을 준다. 오쿨루스를 통해 쏟아져 내려 돔의 내부 곳곳에 꽂히는 원형의 햇살 다발은 너무도 눈부시니 이곳에 모신 만신의 축복이 아닐까? 가히 무한 공간이며 절대 공간. 때때로 날아들어 유영하는 비둘기들조차 신들의 전령인 양 경건하고 신비롭다. 그러니 천재 미켈란젤로(1475~1564) 마저 판테온을 가리켜 천사가 지은 건축이라 하지 않았나... 저 변방, 서울에서 온 이 초라한 건축가는 그저 신의 불공평함을 탓하며 한숨 쉬고는 군중에 묻혀 빠져나갈 뿐이었다.

 

 

[ 제4일 ] - 인연

o 76.77 - 인연을 설명하는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면, 옷깃을 스치는 인연이 되려면 500겁이 쌓여야 한다. 한 겁은 우주가 생성되어 소멸할 때까지의 시간이며 43억 2천만 년이라 했다. 이는 사방 4킬로미터의 바위섬에 선녀가 1년에 한 번 내려와 옷을 스쳐서 섬 전체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라니 어마어마하다. 한데 그 시간의 500배가 지나야 이 세상에서 서로 모르는 이들끼리 옷깃을 스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루카와 나 사이의 인연은 1,000겁은 족히 쌓았을 게다. 친구와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할 인연은 2,000겁이 걸린다고 하며, 하룻밤을 한집에서 자는 인연은 3,000겁을 쌓아야 이뤄진다니 적어도 이번 여행에 동행하는 이들은 모두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루카에게는 서울에 오면 나처럼 하지 말고 꼭 연락하라고 웃으며 이르고 헤어졌다.

 

o 78.79 - 자하 하디드의 건축을 보고 나면 늘 허무한데, 또 그랬다. 기존 건물을 증축하여 확장한 미술관이어서 그녀가 설계한 것치고는 비교적 온건한 외관을 가졌으나, 이 건축의 내부 공간도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었다. 현란하게 흐르는 곡선의 외형이 대단히 몽환적이어서 공간의 조직을 잘 감지하지 못하는 많은 이를 환호하게 하지만, 그 현란함을 걷으면 그녀의 공간은 대부분 관습적이며 때로는 그 형태가 공간의 구성마저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것을 나는 안다. 여기도 그랬다. 건축가를 지식인적 건축가와 예술가적 건축가, 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면 그녀는 철저히 후자에 속한다. 어디에서든 그녀의 예술혼을 심으며 땅이 가진 사연과 주변의 맥락을 무시하니, 우리 삶이 새겨진 장소의 기억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와는 반대편에 있다.

 

o 80.81 - 물론 딱히 그런 모임의 장소로 쓰인 곳만이 아니라 이 공간 모두가 특별하며 성스러울 수밖에 없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죽음은 여기 있으니 삶의 경계를 벗어난 이들이 사는 마을이다.

 

[ 제5일 ] - 이미타티오 크리스티

o 98 - 수도원은 예수의 삶에서 출발합니다.

o 100,101 -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건축가는 건축으로 우리의 삶을 바꾸는 자다. 그래서 건축가가 견지해야 할 태도는 특별해야 한다. 이에 대해 내가 쓴 글의 일부를 다시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건축 설계를 하는 건축가는 인간의 생명과 그 존엄에 대해 스스로 진실하고 엄정해야 하므로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애통해야 하며 의에 주려야 한다. 특히 다른 이들의 삶에 관한 일을 하니 화평케 해야 하고 온유하고 긍휼하며 청결해야 한다. 바른 건축을 하기 위해 권력이나 자본이 펴 놓은 넓은 문이 아니라 고통스럽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스스로를 깨끗게 하여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아야 하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일을 거부해야 한다. 모든 사물에 정통하고 박학하고자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한다. 결단코 불의와 화평하지 않아야 하며, 때로는 그런 행동 때문에 집이나 고향에서도 비난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사람 사는 일을 알고자 더불어 먹고 마셔야 하지만 결코 그 둘레에 갇혀서는 안 된다. 스스로를 수시로 밖으로 추방하여, 광야에 홀로 서서 세상을 직시하는 성찰적 삶을 지켜야 한다. 오로지 진리를 따르며 그 안에서 자유하는 자, 그가 바른 건축가가 된다."

-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한 건축가의 죽음' 중에서

 

o 102,103 - "예수는 광야에서 스스로를 극복하고 자유를 얻은 다음 세상 안으로 다시 들어와 약한 자와 소외된 자, 낮은 자와 핍박받는 자를 안으며 복음을 외치다가 그 민중이 메시아라고 부를 때 십자가에 못 박혀서 또 다시 삶의 경계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하고 불멸이 되었습니다. 이 숭고한 예수의 삶을 본받는 일, 즉 '이미타티오 크리스티 Imitatio Christi'는 사도에게 그들의 목숨을 걸고 감당해야 할 일이었고 결국 순교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순교한 사도의 삶, 다시 말해 '비타 아포스톨리카'는 기독교도에게 신앙의 가장 고귀한 형태로 인식될 수밖에 없지요."

예수는 이미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한복음 제18장 36절)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 독실한 신앙을 가진 이들은 세상의 삶에 목표를 두지 않았다. 더구나 예수의 가르침을 헬레니즘적 논리로 정연하게 설파하며 기독교의 체계를 만든 바울은 '세상이 나를 향해 십자가 위에 죽었다'라며 이 세상에서의 삶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

그렇지만 순교라는 것,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신앙을 지키는 일은 일반인이 수행하기에는 지극히 어려운 성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죽고자 세상의 경계 밖이라 여긴 광야로 떠나 거기에 머물며 신앙을 닦는 일이 수도의 출발이 된다.

 

o 106,107 - 스스로 경계 밖으로 추방당한 자의 삶과 그 공간에 대한 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