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트 쓰기 - 과거의 나와 화해할 이유 >
o 어째서 내가 그런 글을 적었을까? 당연히 기억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정확히 내가 기억하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을까? 그중 어디까지가 실제로 일어난 부분일까? 실제로 일어난 일이 있기는 한가? 애초에 나는 왜 노트를 쓰는 걸까? 이런 모든 면에서 자기를 속이는 건 쉬운 일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특히 강박적이고, 이 같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길이 없으며, 쓸모라고는 강박이 스스로 정당화할 때 그렇듯 우연적이고 부차적인 것뿐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요람에서 싹트거나 아예 싹트지 않는다. 비록 나는 다섯 살 때부터 글쓰기의 강박을 느꼈지만 아무리 봐도 내 딸은 그럴 것 같지가 않다. 그 애는 만사를 긍정하는 특별한 축복을 받은 아이라서 삶이 펼쳐지는 그대로 기뻐하며 두려움 없이 잠들고 두려움 없이 깨어난다. 자기만의 노트를 쓰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부류로, 외롭게 만사에 저항하며 재배치하는 사람이다. 불안한 투덜이, 분명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아이들이다.
o 그래서 내가 노트를 쓰는 이유는 과거에도 그랬고 또 지금도, 내 행위와 사고를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건 완전히 다른 충동으로, 가끔 부러운 마음이 들지만 내게는 없는 현실을 향한 본능이다. 나는 일기를 한 번도 제대로 써본 적이 없다. 나날의 일상에 대한 내 접근 방식은 한심한 나태에서 단순한 부재까지를 아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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