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글, 시

나는 심심하다 - 시인 김용택

조앤디디온 2018. 11. 8. 14:25





사람들은 텃밭에 마늘을 심고, 배추와 무는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가을채소들은 빨리도 자란다. 귀뚜라미와 지렁이의 울음소리들이 사라지자 풀들은 말라가고, 오동잎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커서 놀란다. 숨어서 익은 호박이 담장 위에 누런 몸을 드러낸다. 새 잎 피던 봄날은 어디 갔는고, 날개로 강물을 찍어가던 꾀꼬리는 어디 갔는고. 나는 심심하다. 너무너무 심심하다. 너무 심심하면 나는 마루에 앉아 앞산을 바라본다. 나라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 부산하지만, 나는 이렇게 앉아 스님들만큼이나 심심하다. 심심하게 앉아 있으면 새가 나는 것도 보이고, 나비가 균형을 잡으며 날아가는 것도 보이고, 벼가 살랑대는 것도 똑똑하게 보이고, 감잎 부딪치는 소리도 정확하게 들린다. 텃밭의 쪽파가 어제보다 크게 자란 것을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다. 심심해야 다 보인다. 심심하지 않다는 것은 지금 자기 것만 보고 있다는 뜻이다.


               - 농민신문 시심으로 보는 세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