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글, 시

인간의 굴레에서1 - 세계문학전집

조앤디디온 2018. 11. 19. 03:13




[1~64]


o 18 - 불구에 대한 말이 나오기만 하면 늘 그렇듯, 필립은 귀뿌리까지 빨개졌다. 퍼킨즈 교장은 그를 엄숙하게 바라보았다. 「넌 네 불행에 대해 좀 과민한 것 같다.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니?」필립은 얼른 교장을 올려다보았다. 입을 꼭 다물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사람들 말을 곧이듣고, 하느님이 문둥이를 고치고 장님을 눈뜨게 해주셨던 것처럼 저도 고쳐주십사 하고 얼마나 빌었던가. 「그것을 반항심으로 받아들이면 수치로만 여겨질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하느님이 네게 짊어지게 한 십자가로 생각해 보아라. 네 어깨가 특별히 강하여 사랑의 표시로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고 생각해 보란 말이다. 그러면 그게 불행이 아니라 행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하지만 교장은 상대방이 이 문제를 거론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만 돌아가도록 했다. 필립은 교장의 말을 곰곰이 되씹어보았다.


o 45 - 「비위를 맞추려고 하진 말게」크론쇼는 통통한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난, 내 시작품에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네. 인생이란 쓰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있는 것이니까. 내 목표는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네. 삶의 순간순간에서 그 순간의 정서를 음미하면서 말야. 난 내 글쓰기를 말이지, 존재로부터 기쁨을 흡수한다기보다 거기에 기쁨을 부여하는 아름다운 행위라고 보네. 후세의 문제는 말일세 - 후세는 상관없네」

필립은 미소지었다. 이 삶의 예술가가 써내는 것은 형편없는 화가의 졸작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크론쇼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더니 잔을 채웠다. 그는 웨이터에게 담배 한 갑을 가져오라 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하니 자넨 재미있을 거네만, 아다시피 난 가난해서 조그만 다락에서 살고 있어. 미용사들하고 카페의 보이들이랑 짜고 나를 등쳐먹는 상스러운 여자하고 말이지. 영국 독자를 위해 쓰레기 같은 책을 번역하기도 하고 욕먹을 가치도 없는, 형편없는 그림을 보고 논평을 쓰기도 하지. 하지만 자네, 인생의 의미가 도대체 뭔지 말할 수 있겠나?」

「글쎄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죠.」

「아닐세. 자네 스스로 답을 발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그런데 자넨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o 45 - 크론쇼의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행상인은 더 비굴하게 웃으면서 마술사처럼 백단향 상자를 꺼냈다. 「아니오. 동방의 베틀로 짠 고귀한 천을 보여주시오. 교훈을 가르치고 이야기를 돋보이는 데 사용하고 싶으니」크론쇼는 근엄하게 말했다. 레반트 사람은 빨갛고, 노랗고, 상스럽고, 끔찍하고 괴이한 탁상보를 펼쳤다. 「삼십 프랑」그가 말했다. 「오, 이런. 이 천은 사마르칸드(우즈베키스탄 중동부에 있는 도시)의 직조공이 짠 것이 아니고, 이 빛깔은 부하라(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주의 주도. 직물, 피혁, 융단 공예가 전통적으로 활발하다)의 염색통에서 염색한 것이 아니도다」「이십오 프랑」행상인이 알랑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이것이 만들어진 곳은 세계의 북단, 내가 태어난 버밍엄이겠지」「십오 프랑」턱수염의 사나이는 비굴하게 말했다. 「그대여, 떠나시오. 나귀들이 그대의 외조모 무덤을 더럽힐지어다」크론쇼가 말했다. 천연덕스럽게, 그러나 웃음을 지우고 레반트 사람은 물건을 다른 테이블로 가지고 갔다. 크론쇼는 필립에게 말했다.

「자네, 클뤼니 미술관(파리의 클뤼니 호텔에 있는 미술관)에 가봤나? 거기 가면 페르시아 양탄자들이 있네. 색조가 절묘하기 짝이 없고 무늬가 얼마나 아름답고 정교한지 보기만 해도 절로 즐거운 감탄이 나오지. 그걸 보면 자넨 동방의 신비와 관능미가 무언지 알 수 있고, 하피즈(페르시아의 서정 시인)의 장미와 오마르의 술잔을 볼 수 있네. 하지만 거기에서 곧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지. 자넨 금방 인생의 의미가 무어냐고 묻지 않았나. 가서 페르시아 양탄자를 보게, 그러면 조만간 답을 얻을 수 있을 걸세」

「난해하군요」필립이 말했다. 「난 취했네」크론쇼가 말했다.


o 51 - 두 달이 지났다.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필립은 이런 느낌이 들었다. 진정한 화가나 작가, 음악가에게는 자기의 일에 완전히 몰입하게 하는 어떤 힘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삶을 예술에 종속시키게 된다는 것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어떤 힘에 굴복하여,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본능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느라 그들의 인생은 살아보지도 못한 채 손가락 사이로 새나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필립에게는, 인생이란 그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살아야 할 대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삶의 다양한 체험을 추구하고, 삶의 매 순간이 주는 모든 감동을 향유하고 싶었다. 마침내 그는 행동을 취하고 그 결과를 따르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이왕 마음 먹은 이상 쇠뿔은 단김에 빼자고 생각했다. 마침 이튿날은 프와네가 오는 날이었다. 그는 자기가 그림 공부를 계속할 만한 가치가 있겠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프와네 선생이 패니 프라이스에게 해주었던 무지막지한 충고를 잊을 수 없었다. 그 충고는 옳은 것이었다...


o 59 - 그녀는 재미있지도 영리하지도 않다. 머리도 평범하다. 실속 챙기는 쪽으로만 천박한 꾀가 많아 역겨울 뿐이었다. 상냥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스스로도 말하듯이 제 잇속만 챙겼다. 순진한 사람을 골탕먹이는 장난이라면 얼른 관심을 가졌다. 누군가를 속여먹고 나서는 언제나 기분좋아했다. 음식을 먹을 때는 요조숙녀인 듯 온갖 점잔을 빼는데, 그런 그녀를 생각하니 필립은 무섭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거친 말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보잘것없는 어휘로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으면 배기지 못했다. 걸핏하면 아무 말이나 품위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바지>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고 대신 늘 <하의>라고 했다. 코를 푸는 것조차 상스럽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코를 풀 때는 무슨 못할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풀었다. 빈혈증이 심했고 빈혈증에 따르는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슴이 납작하고 엉덩이가 작은 것도 정이 떨어졌다. 머리 모양이 저속한 것도 싫었다. 필립은 그런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이 혐오스럽고 경멸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학교 다닐 때 덩치 큰 아이의 손아귀에 붙잡혀 꼼짝 못했던 때의 느낌이었다. 처음엔 상대방의 강한 힘에 맞서 발버둥쳐 보지만 결국 힘이 다 빠져 완전히 무력해지고 만다 - 감각이 마비된 듯 사지가 나른해지던 그 야릇한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 그러고 나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바로 지금 그러한 무력감이 느껴졌다. 그는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으로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용모나 성격의 결함은 문제가 아니었다. 결점마저도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그런 것들은 필립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무래도 문제는 자기가 아니었다. 그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그 힘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기의 이익에 거슬러 그를 움직였다.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강한 그는 자기를 얽매고 있는 그 사슬이 싫었다. 자기를 꼼짝 못하게 하는 열정을 얼마나 경험하고 싶었던가를 생각하니 자신이 가소롭기만 하였다. 일의 시발을 생각해 보았다. 던스퍼드와 그 찻집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 자기 잘못이었다. 우스꽝스런 허영심만 없었더라면 이 형편없는 여자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o 64 -「처음 파리에 갔을 때 들었던 얘기가 생각나요. 아마 클러튼이었을 텐데, 아름다움이란 화가와 시인이 사물에 부여한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더군요. 화가와 시인이 아름다움을 창조한답니다. 그 자체로서는 지오토(이탈리아의 화가)의 종루나 공장의 굴뚝 가운데 어느것이 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는 거죠. 그런데 아름다운 사물은 다음 세대들에 불러일으키는 정서 때문에 점점 풍요로워집니다. 옛것이 현대적인 것보다 더 아름다운 건 그 때문이지요.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영국 낭만주의 시인 Jhon Keats가 쓴 시)」는 그것이 씌어졌을 때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백 년 동안 많은 연인들이 그 시를 읽어왔고 상심한 사람들이 그 시행에서 위로를 느꼈기 때문이지요」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의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는지, 필립은 말하지 않고 헤이워드가 스스로 짐작하도록 두었다...


o 64 -「낭비라고요? 저 아이의 움직임을 좀 보세요. 그리고 나무 새로 비쳐든 햇빛이 땅바닥에 만드는 무늬를 보세요. 저 하늘을 좀 보세요. 글쎄, 제가 파리에 가지 않았더라면 저 하늘을 보지 못했을 거예요」헤이워드는 필립이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나?」「아무것도 아녜요. 죄송해요. 감상적이 되었나 봐요. 지난 육 개월 동안 하도 아름다움에 굶주려 와서 말예요」「자넨 아주 실제적인 사람이었잖나. 자네한테 그런 소리 듣다니 재미있군」「집어치워요. 재미있는 사람 따윈 되고 싶지 않으니」필립이 소리내어 웃었다. 「맛없는 차나 한잔 하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