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 122 】
o 66 - 그는 그녀의 용기, 그녀의 낙관주의, 운명에 대한 그녀의 건방진 도전적 태도에 경탄했다. 그녀에겐 나름의 소박하고도 실제적인 철학이 있었다. 「 전 말예요. 교회라든가 사제라든가 하는 것 죄다 믿지 않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 하지만 신은 믿어요. 그리고 사람이 제 할 일을 다 하면서, 또 다리를 저는 개가 울타리를 넘을 수 있도록 가능할 때 도와준다면 신도 우리가 하는 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요. 전 사람들이 대체로 선량하다고 봐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 유감이지만 말예요 」「 그럼 내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필립이 물었다. 「 아,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 하지만 희망은 걸겠어요. 아무튼 거기에선 집세 낼 걱정이나 소설 나부랭이 써야 할 걱정은 없겠죠 」
그녀는 은근히 상대방을 추켜주는 여자다운 소질이 있었다. 필립이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없음을 알고 파리를 떠난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고 했다. 그녀가 열심히 칭찬해 주자 필립은 기분이 황홀했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의 행동이, 용기가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의지가 나약했기 때문인지를 잘 판단하지 못했다. 그녀가 그것을 영웅적인 행위로 생각함을 알고 그는 기뻤다. 필립의 친구들이 본능적으로 피했던 화제도 그녀는 대담하게 거론하고 나섰다. 「 당신이 다리에 그렇게 민감한 건 어리석은 일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상대방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도 그녀는 말을 계속한다. 「 사람들은 말예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걸 의식하지 않아요. 처음 볼 땐 의식하겠지만 그 다음엔 잊어버려요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o 67 - 「 지금쯤 플라톤은 졸업했으리라 생각했는데요 」필립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 그럴까?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가 물었다. 헤이워드는 그 문제를 더 거론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최근에 와서 그는 침묵의 효과적인 위엄을 발견한 듯했다. 「 전 모르겠어요. 같은 걸 되풀이해 읽어서 무슨 소용이 있는지 」필립이 말했다. 「 그건 일없는 사람이 시간을 힘들게 보내는 방식에 지나지 않죠 」「 그렇다면 자넨, 머리가 아주 뛰어나서 그 심오한 저자의 글을 한번 쓱 읽어서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 저는 플라톤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요. 전 비평가가 아닌걸요.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하기 때문이죠 」 「 그렇다면 자네는 왜 읽나? 」 「 얼마간은 재미로 읽죠. 버릇이 그렇게 된 데다 읽지 않으면 마치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처럼 안정이 안 되거든요. 그리고 얼마간은 제 자신을 알고 싶어 읽습니다. 책을 읽을 때는 제 눈으로만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가끔은 제게 의미가 있는 어떤 구절, 아니면 어떤 어구인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걸 만나게 되고, 그러면 그것은 제 일부가 되지요. 전 제게 도움이 되는 것만 책에서 얻어내요. 같은 걸 열 번 읽는다 해도 더 이상은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독자란 마치 아직 열리지 않은 꽃봉오리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읽거나 행한다고 해도 대부분은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해요. 다만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들은 꽃잎처럼 열리지요. 하나씩 하나씩 말예요. 그러다 마침내 우리는 활짝 핀 꽃을 보게 되는 겁니다 」
필립은 자신의 비유가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느낌이 오면서도 선명하지는 않는 어떤 것을 어떻게 달리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자넨 무엇인가를 하고 싶고, 무엇인가가 되고 싶은 거야 」 헤이워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그건 아주 속물스러운 거야 」필립은 이제 헤이워드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나약하면서 자존심이 강했다. 자존심이 너무 강해 상대방은 그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했다. 그는 무위와 이상주의를 뒤섞어서 그 둘을 구별하지 못했다.
o 81 - 그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수련의와 잡담을 하는 동안 안내인이 재진 환자들을 몰고 왔다. 환자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앞머리 장식을 길게 늘어뜨리고 입술이 창백한 빈혈증의 처녀들이 - 이들은 양도 부족하고 질도 형편없는 음식을 그나마 제대로 소화시키지도 못한다 - 들어오고, 잦은 출산으로 빨리 늙어버린 살찐 할머니, 깡마른 할머니들이 해수병으로 들어오고, 이런 문제, 저런 문제, 갖가지 문제를 가진 여자들이 들어온다. 티렐 박사와 수련의는 이들에 대한 진찰을 재빨리 해치워 버린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그만 방 안의 공기는 점점 메스꺼워진다. 박사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 오늘 초진온 여자 환자들이 많나? 」 박사가 물었다. 「 꽤 되는 것 같습니다 」 수련의가 대답했다. 「 그 사람들 들여보내지. 재진 환자는 자네가 계속 보고 」 초진 환자들이 들어왔다. 남자의 병은 거의 과음 때문이었지만, 여자의 경우, 영양실조가 많았다. 여섯시경이 되자 진료가 끝났다. 필립은 탁한 공기 속에 서서 내내 보조를 하느라고 지칠 대로 지친 몸을 끌고 동료들과 차를 마시러 학교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하고보니 일은 아주 흥미로웠다. 거기에는 가공되지 않은, 예술가가 다루어야 할 재료 그대로의 인간이 있었다. 필립은 자신이 예술가이고 환자들은 손 안의 진흙과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야릇한 전율을 느꼈다. 그는 파리 시절을 떠올리며 흐믓한 기분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 시절 그는 아름다움을 창조해 보겠노라고 색채며 색조며 명암이며 하는 것들에 깊이 몰두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을 직접 접촉해 보니 전에 느껴보지 못한 힘의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는 한없는 흥분을 느꼈다. 들어오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 독특했다. 어떤 사람은 점잖치 못하게 발을 질질 끌며 들어왔고, 어떤 사람은 경쾌한 걸음걸이로, 어떤 사람은 무겁고 느린 걸음으로, 또 어떤 사람은 수줍게 걸어 들어왔다. 때로는 겉만 보고도 직업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상대방이 알아듣게 하려면 어떻게 물어야 하는가를 배웠다. 어떤 문제에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게 되는가, 어떤 질문을 던지면 진실을 말하게 되는가도 배웠다. 사람들은 같은 것에 대해서도 저마다 달리 반응하였다. 위험한 병의 진단을 내려도 웃으면서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절망한 나머지 말을 못하는 사람도 있다. 필립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이들 환자를 대할 때 수줍음이 덜 느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따. 환자들에게 딱히 동정을 느낀다고는 할 수 없었다. 동정이란 일종의 우월감을 뜻했으니까. 하지만 환자들과는 마음이 편했다. 알고 보니, 자신에게도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에게 환자가 맡겨지면, 환자 쪽에서도 묘하게 그를 신뢰하여 그의 손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 같았다. < 혹시, 난 의사가 되게끔 태어났는지 몰라. 적성에 맞는 직업을 택했다면 그야말로 운이 좋은 것이다. > 그는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o 85 - 그러나 곧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 그는 책을 밀어놓고 말았다. 무엇보다 마음을 괴롭힌 것은 바로 얼마 전에 끝나버린 저 인생의 그지없는 허무함이었다. 그가 지금 살아 있다든가 죽어 있다든가 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필립은 젊은 시절의 크론쇼를 상상해 보았다. 몸은 호리호리하고 발걸음은 경쾌하며, 머리카락이 더부룩한 청년, 활달하고 희망에 부풀어 있는 청년 크론쇼를 머릿속에 그려보려 했으나 아무래도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필립이 세웠던 삶의 원리, 그러니까 길모퉁이 저쪽에 있는 경관을 조심하면서 자신의 본능을 따르는 것, 그 원리도 이 경우에는 별로 소용이 없었다. 크론쇼가 바로 그런 원리에 따라 살았기 때문에 저처럼 비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지 않았는가. 본능이란 믿을 것이 못 되었다. 필립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문해 보았다. 그러한 삶의 원리가 소용없다면 도대체 어떤 원리가 있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이런 방식이 아니고 저런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결국 감정에 따라 행동하리라. 하지만 그 감정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결과가 좋게 끝난다거나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거나 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 아닐까. 생각할수록 삶이란 얽히고설킨 혼돈만 같았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힘에 사로잡혀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목적도 증발해 버린다. 그저 뛰기 위해 뛰고 있는 것만 같다.
o 88 - 애설리는 스페인의 신비주의 작가들, 테레사 데 아빌라와 산 후안 데 라 크루스, 프라이 디에고 데 레온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들은 모두, 필립이 엘 그레코의 그림에서 느낀 것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형체가 없는 것을 만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그의 시대가 산출한 스페인 사람이었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위대한 국민의 온갖 드높은 위업들이 약동하고 있었다. 그들의 공상은 아메리카와 카리브 해의 푸른 섬들의 찬란한 영광으로 넘치고 있었다. 그들의 핏줄에는, 오랜 세월 무어족과 싸우면서 얻은 힘이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세계의 주인이었기에, 그들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들은 제각기 가슴속에서 저 카스티야의 광막한 광야와 황갈색 황야와, 눈 덮인 산맥을, 안달루시아의 햇빛과, 푸른 하늘과, 들꽃 만발한 평원을 느끼고 있었다. 삶은 열정적이고 풍부했다. 삶이 풍부했으므로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끊임없이 동경했다. 그들은 인간이었으므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열렬한 생명력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향한 탐구에 격렬하게 내쏟았다. 애설니는 그가 한동안 심심풀이삼아 번역해 두었던 시를 읽어 줄 상대를 만나 자못 기분이 좋았다.
o 88 - 필립은 관념주의에 대해 얼마간 경멸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삶에 대해 늘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여태껏 만난 관념주의는 대체로 삶으로부터의 비겁한 도피처럼 여겨졌다. 관념주의자는, 번잡한 인간 세계를 견디지 못하고, 그곳에서 몸을 빼낸다. 싸울 힘이 없는 그는 삶의 투쟁을 비속하게 여긴다. 그는 자만심이 강하며, 남들이 자기를 스스로 평가하는 만큼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에 남들을 경멸함으로써 위안을 삼는다. 필립이 보기에, 그 전형은 헤이워드였다. 잘생기고, 게으르며, 이제 너무 살이 찐데다 대머리가 되어가고 있는데, 아직도 옛 미모의 흔적을 간직하면서 확실치는 않지만 언젠가는 굉장한 일을 하고 말겠노라는 뜻을 아직도 그럴싸하게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허풍 뒤에는 길거리의 천박한 연애와 위스키밖에 없었다. 헤이워드로 대표되는 이것에 대한 반동으로, 필립은 < 있는 그대로의 삶 >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불결, 악덕, 불구에 그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벌거벗은 인간을 원한다고 선언했다. 비열성이나 잔인성이나 이기심, 혹은 탐욕의 예를 목격할 때, 그는 오히려 흥미를 느꼈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기 때문이다. 파리 시절, 그는 삶에 아름다움도 추함도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진실뿐임을 배웠다. 미의 탐구는 감상적인 일에 지나지 않았다. 아름다움의 폭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는 풍경화에 < 쇼콜라 므니에 >의 광고판을 그려넣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그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깨달은 느낌이 들었다. 이미 한동안 그것을 향해 망설이면서 다가가고 있었지만, 이제야 그 사실을 뚜렷이 알게 된 느낌, 바야흐로 발견의 순간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어렴풋하게나마 그가 여태껏 경배해 온 리얼리즘보다 더 나은 것이 여기에 있다고 느껴졌다. 물론 그것은 나약하기 때문에 물러서는 생명 없는 관념주의는 아니었다. 그것은 강한 것, 힘찬 것이었다. 그것은 삶의 다양함을, 삶의 활력을, 아름다움과 추함, 고매함과 비열함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것 역시 리얼리즘이기는 하지만 한 차원 높은 현실주의, 사실들에 더 강렬한 빛을 던져 그것들을 다른 것으로 변모시키는 리얼리즘이었다. 필립은 지금은 죽고 없는 저 카스티야 귀족들의 준엄한 눈을 통해 사물을 더 심오하게 보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격렬하고 뒤틀려 보였던 성자들의 몸짓도 이제는 어떤 신비스런 의미를 띠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메시지, 중요하긴 하지만 미지의 언어로 되어 있어 해독할 수 없는 메시지 같았다. 그는 늘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그 의미가 있는 듯이 여겨졌다. 다만 그것은 불투명하고 애매했다. 그는 깊은 번민에 빠졌다. 그는 진리처럼 보이는 것이 폭풍우 몰아치는 어두운 밤, 번개의 섬광에 한순간 드러난 산맥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목도하였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우연에 맡길 필요가 없다는 것, 사람의 의지란 강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또한, 자기통제라는 것이 격정에 굴복하는 의지만큼이나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 자세일 수 있다는 것, 내면의 삶도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미지의 땅을 탐험한 사람의 삶과 마찬가지로 다양하고, 다채롭고, 풍부한 경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o 106 - 「 정말 가엾고 불쌍들 하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입을 벌린 구경꾼들, 안내서를 들고 돌아다니는 뚱뚱한 외국인들, 상점에 바글거리는 천하고 평범한 사람들, 쩨쩨한 탐욕과 저속한 걱정거리들을 가진 이 모든 사람들은 결국 죽을 운명을 가진 존재이다. 이들 역시 사랑을 하며 사랑하던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 아들은 어머니와, 아내는 남편과, 그런데 이들의 삶이 추하고 더럽기 때문에 그들의 사별은 더 비극적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아주 아름다운 묘석이 하나 있었다. 두 청년이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었다. 선의 과묵함과 단순함을 보노라면 조각가가 이별의 감정을 정확하게 느끼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 세계가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가장 값진 것, 곧 우정에 대한 하나의 탁월한 기념비였다. 그것을 보면서 필립은 눈물이 핑 돌았다. 헤이워드가 생각났고,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열렬히 존경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실망이 뒤따랐고, 그 다음은 무관심하게 되었고 결국은 버릇과 추억만으로 관계를 지탱했다. 사는 일의 기묘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어떤 사람을 몇 달 동안이나 하루도 빼지 않고 만나 너무 친밀해져서 이제 그 사람 없이는 살지 못할 듯한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헤어지게 된다. 그래도 모든 것은 아무 탈없이 진행된다. 없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던 친구가, 지나고 보니 없어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활은 계속되고 헤어진 사람에 대한 그리움도 느끼지 못한다. 필립은 하이델베르크 시절의 젊은 날을 생각했다. 헤이워드는 유능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미래에 대한 열정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조금씩 조금씩 실패자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제 그도 죽었다. 그의 죽음도 그의 삶 만큼이나 허망했다. 하잘 것 없는 병으로, 볼품없이 죽고 말았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또 한번 뭔가 성취하는 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태어나지 않았던 것보다 나을 바 없는 삶이었다.
도대체 살아서 뭐 한다는 말인가? 필립은 절망적인 기분으로 자문해 보았다. 산다는 게 온통 허망하게 여겨졌다. 크론쇼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세상에 태어나 살았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는 죽어 잊혀지고 말았다. 팔리다 만 그의 시집이 헌책방에 놓여 있을 뿐. 주제넘은 저널리스트로 하여금 한 편의 서평을 쓰게 만든 것뿐, 그의 삶은 어떤 것에도 이바지한 게 없어보였다. 필립은 속으로 소리질렀다.
「 도대체 살아서 뭐 한단 말인가? 」
노력과 결과는 전혀 맞아들지 않았다. 젊은 시절 빛나던 희망을 가졌던 대가는 쓰라린 환멸뿐이었다. 고통과 병과 불행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인생을 시작할 무렵의 그 드높았던 희망, 그의 육체에서 비롯했던 어쩔 수 없었던 한계, 친구다운 친구가 없어 느꼈던 외로움, 청년기 내내 견뎌내야 했던 애정의 결핍 등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늘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일만 해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왜 이런 비참한 실패를 맛보아야 한단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조건으로도 성공을 거두고, 또 어떤 사람들은 훨씬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도 실패한다. 만사가 순전히 우연이란 말인가. 비는 착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내린다. 그런데 인생에서는 어느 것에도 이유나 까닭이 없다.
크론쇼를 생각하며 필립은 그가 주었던 페르시아 융단을 떠올렸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것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줄 것이라고 했었다. 갑자기 그 해답이 떠올랐다. 그는 픽 웃었다. 답을 알고 나니 수수께끼 문제를 받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답을 알아맞추기 위해 골머리를 앓다가 답을 듣고 나면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법이다. 해답은 분명했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o 106 - 그러자 현자는 임금에게 사람의 역사를 단 한 줄로 줄여 말해 주었다. 그것은 이러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사람의 삶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난다거나 태어나지 않는다거나, 산다거나 죽는다거나 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삶도 무의미하고 죽음도 무의미하다. 필립은 벅찬 기쁨을 느꼈다. 소년 시절, 신을 믿어야 한다는 무거운 신앙의 짐을 벗어버렸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이제 책임이라는 마지막 짐까지도 벗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셈이었다. 자기 존재의 무의미함이 오히려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제까지 자기를 박해한다고만 생각했던 잔혹한 운명과 갑자기 대등해진 느낌이 들었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면, 세상도 잔혹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실패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성공 역시 의미가 없다. 그는 우주의 역사에서 아주 짧은 순간, 지구의 표면을 점유하고 있는 바글대는 인간 집단 가운데 아주 하찮은 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혼돈 속에서 허무의 비밀을 찾아냈으니 그는 전능자라 할 만했다. 필립의 벅찬 상상 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얽히고설키며 잇따라 떠올랐다. 그는 뿌듯한 만족감을 느끼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펄쩍펄쩍 뛰며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 아, 삶이여!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 아, 삶이여, 그대의 독침은 어디 있는가? 」- 역자 : 고린도전서 15:55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를 패러디한 것이라고 함.
o 106 - 크론쇼가 페르시아 양탄자를 선물했던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해주려 했던 듯하다. 직조공이 양탄자의 정교한 무늬를 짜면서 자신의 심미감을 충족시키려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았듯이, 사람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또 사람의 행동이 사람의 선택을 넘어서는 곳에 있다고 믿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삶도 나름의 무늬를 짜고 있다고, 어떤 행위는 쓸모가 없는 만큼 꼭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것뿐이다. 살아가면서 겪는 온갖 일들과 행위와 느낌과 생각들로써 그는 하나의 무늬를, 다시 말해, 정연하거나 정교한, 복잡하거나 아름다운 무늬를 짤 수 있다. 선택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또한 현상과 달빛을, 함께 얽어 짤 수 있는 환상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그렇게 여겨지면 그런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배경으로 하여, 삶의 거대한 날실에(알지 못할 샘에서 흘러나와 알지 못할 바다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은), 사람은 다양한 실가닥을 선택하여 무늬를 짬으로써 자기만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장 뚜렷하고,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아름다운 무늬가 하나 있다. 태어나, 성장하여 결혼하고, 자식을 생산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하다 죽는다는 무늬가 그것이다. 하지만 복잡하고 훌륭한 다른 무늬들도 있다. 행복이 없는 무늬,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 무늬가 그것이다. 그것들에서도 한결 착잡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삶들은 - 헤이워드의 삶도 그중 하나이지만 - 우연이라는 눈먼 무관심에 의해 디자인이 완성되기도 전에 끊겨버린다. 그래서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위안이 편하다. 크론쇼와 같은 삶은 이해하기 어려운 무늬다. 그러한 삶도 그 나름대로 정당하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관점이 바뀌고 옛 기준은 바뀌어야 한다.
필립은 행복을 얻고 싶은 욕망을 버림으로써 그의 마지막 미망을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행복이라는 척도로 삶을 잰다면 이제까지 그의 삶은 끔찍했다. 하지만 이제 다른 척도로도 잴 수 있음을 알고 나니 절로 기운이 솟는 듯했다. 고통도 문제가 아니듯 행복도 문제가 아니었다. 살면서 만나는 행복이나 고통은 모두 삶의 다른 세부적인 사건들과 함께 디자인을 정교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한순간 그는 삶의 우연사들을 넘어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들은 전처럼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슨 일이든 이제는 삶의 무늬를 더 정교화하는 데 보탬이 되는 동기가 될 뿐이다. 종말이 다가오면 그는 무늬의 완성을 기뻐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품이리라. 그 예술품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자기뿐이라 한들, 자신의 죽음과 함께 그것이 사라져버린다 한들 그 아름다움이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립은 행복했다.
o 121 - 그는 그 어촌에서 샐리와 함께 꾸려나갈 생활을 상상해 보았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조그만 집을 하나 얻으리라. 거기에서 그가 가보지 못한 나라들을 향해 항해하는 커다란 배들을 바라보리라. 그게 가장 현명한 일일지 모른다. 크론쇼도 언젠가, 공상의 힘으로 시공의 두 영역을 영유하는 사람에게는 삶의 사실들이란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맞는 말이다. < 그대는 영원히 사랑할 것이며, 그녀는 영원히 아름다우리라. >
아내에게 그가 가진 모든 드높은 희망을 결혼 선물로 주리라. 자기 희생! 그것의 아름다움에 필립의 마음은 뿌듯해졌다. 밤 내내 그 일만을 생각했다. 너무 흥분되어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집에서 쫓겨난 사람처럼 거리로 나와 기쁨에 떨리는 가슴으로 버드케이지 워크 거리를 하염없이 오르내렸다. 초조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결혼 제의를 할 때 행복해할 샐리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늦은 밤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그는 바다를 볼 수 있게끔 덧문을 올려둔 아늑한 거실에서 샐리와 함께 지내게 될 긴 저녁들을 그려보았다. 그는 책을 읽고 그녀는 몸을 굽혀 바느질을 하고 있다. 갓을 씌운 램프의 불빛이 그녀의 어여쁜 얼굴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두 사람은 자라는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눈길을 돌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사랑의 빛이 어리어 있다. 그리고 환자로 찾아오는 어부와 그들의 아내들도 두 사람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되고, 두 사람 또한 그곳에서 소박한 삶의 애환을 함께 나누게 된다. 하지만 다시 그의 생각은 두 사람의 아들에게 돌아간다. 벌써부터 열렬한 부정이 가슴속에서 느껴진다. 아이의 온전한 팔다리를 손으로 어루만지는 상상을 해본다. 틀림없이 잘생긴 녀석이리라. 그가 가진 풍부하고 다채로운 삶에 대한 꿈을 죄다 그 아이에게 물려주리라. 지난날의 기나긴 여정을 되돌아보며 필립은 자신의 과거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삶을 그처럼 힘들게 만들었던 불구도 받아들였다. 불구 때문에 성격이 비뚤어졌음을 알고 있지만 이제는 불구 때문에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는 내면 성찰의 힘을 기를 수 있었음도 아울러 알고 있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아름다움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며, 예술과 문학에 대한 열정, 그리고 삶의 다양한 모습들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조롱과 멸시를 엄청나게 받아왔지만 그 조롱과 멸시는 그의 정신을 안으로 향하게 했고, 영원히 그 향기를 잃지 않을 정신의 꽃들을 피워냈다고 할 수 있다. 그 순간 그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오히려 드문 일임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몸에든 마음에든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알아왔던 모든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그러고 보면 온 세상이 병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거기에 무슨 까닭이나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몸은 불구이고 마음은 비뚤어진 사람들의 기나긴 행렬들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에 병이 들어 심장이 허약하거나 폐가 허약했고, 어떤 사람들은 정신에 병이 들어 의지가 나약하거나 밤낮없이 술만 찾았다. 이 순간 필립은 이 모든 사람들에게 성자와 같은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맹목적인 우연의 무력한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다. 필립은 그리피스의 배신을, 그에게 고통을 가져다준 밀드레드를 모두 용서할 수 있었다. 그네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한 가지 분별 있는 태도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고 잘못은 참아내는 일뿐이다. 그리스도가 죽어가면서 했던 말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o 122 - 그는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보니 그가 결혼을 생각했던 것은 자기 희생 때문이 아니었다. 아내와 가정과 사랑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버리자 그는 돌연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그는 그것들을 원하고 있었다. 스페인이 무엇이며, 코르도바, 톨레도, 레온 따위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에게 버마의 불탑이며 남태평양의 초호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메리카는 다름아닌 바로 이곳에 있다. 생각해보면 그는 그 동안 남의 말과 글이 주입해 온 이상을 좇아왔을 뿐 제 마음의 욕망을 따른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의 행로는 언제나 어떤 것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좌우되었을 뿐 제 마음이 진정 원하는 바를 따른 적이 없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는 이 모든 거짓을 내던져버렸다. 그는 지금까지 미래만을 염두에 두고 살아왔다. 그래서 현재는 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이상? 그는 의미없는 삶의 무수한 사실들로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짜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가장 단순한 무늬, 그러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죽음을 맞는 그 무늬가 동시에 가장 완전한 무늬임을 깨닫지 않았던가? 행복에 굴복하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그것은 수많은 승리보다 더 나은 패배였다.
그는 샐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고는 다시 눈길을 돌렸다.
「 결혼해 달라고 할 생각이었어 」그가 말했다. 「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은 했어요. 하지만 공연히 남의 앞길을 방해하고 싶진 않아요 」「 방해되지는 않아 」「 여행은 어떻게 하구요. 스페인이랑 다른 데랑 」「 내가 여행하고 싶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 저도 조금은 알 수밖에요. 아빠하고 그 이야길 얼마나 열심히 하셨어요. 다 들었죠 」「 그까짓 것 상관없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춘 다음 나지막하고 쉰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 난 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아. 샐리를 떠날 수 없어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필립은 알 수 없었다. 「 나와 결혼해 주겠지, 샐리?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 좋으시다면 」「 원하지는 않는단 말야? 」「 아뇨, 저도 당연히 제 집을 가지고 싶어요. 이제 자리를 잡아야 할 때도 됐구요 」
그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이제는 그녀를 웬만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가 별로 놀랍지 않았다. 「 그렇다고 나하고 결혼하고 싶다는 건 아니잖아? 」「 딴 사람하고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 그럼 그걸로 됐군 」「 엄마 아빠가 놀라시겠죠? 」「 난 정말 행복해 」「 전 배고파요 」「 아, 샐리 」
필립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술관을 걸어나왔다. 그들은 잠시 난간에 서서 트라팔가 광장을 내려다 보았다. 이륜마차와 승합마차들이 분주히 오가고, 사람들이 사방으로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햇빛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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