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등 감상평

이창동 감독의 버닝 후기 감상평 1 - 줄거리 장면별 정리 + 나름의 해석 (스포 있음)

조앤디디온 2018. 12. 19. 03:12



버닝을 3번 보았다.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에 관한 한 참 나쁘다. 영화를 다 보고도 제대로 영화를 보았다고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마치 소설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읽듯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붙잡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는 감독의 메타포(metaphor :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 그것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일)로 가득하다. 이창동 감독은 영화의 러닝타임 시간을 꽉 채워서 한 편의 소설 내지 그림을 완성하였다. 마치 숨은그림 찾기를 하듯 독자들은 감독이 숨겨놓은 그 메타포를 찾아야 한다. 감독이 영화 안에 숨겨놓은 또 다른 메시지를 퍼즐처럼 탐색하도록 한다.

감독은 극 중 인물 벤의 대사를 통하여 '메타포'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하는데, 이는 이 영화가 메타포 그 자체이거나 메타포로 가득 차 있음을 암시한다. 감독 스스로 주재자가 되어 제사의식을 준비하고(벤의 대사에서 암시된다.) 관객은 영화를 통하여 그 의식의 어딘가에 참여하게 된다. 그 의식이 무엇을 의도한 것인지는 독자 각자의 몫일 것이다.


'버닝'을 3번 보았다고 했는데, 처음 1번은 그냥 보았다. 그리고 다음 2번째는 이 영화 속에 숨겨진 메타포를 주시하면서 보았다. 그런데 2번을 보아도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뭔가 놓친 것 같은 느낌, 그 느낌 때문에 결국 3번을 보았다. 3번째 볼 때는 아예 한 장면 한 장면을 베끼면서 소설을 읽듯이 보았다. 

2번째 보았을 때, 영화가 주는 막연한 이미지에 의하여 떠오른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소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작가님)이었고, 다른 하나는 철학적 이론으로서 「유물론」이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3번째 영화를 그대로 베끼면서도 아직 확신이 없다. 나는 여기서 영화를 통째로 정리하면서 그 이유를 찾고 싶다.



[ 장면 1 - 낮. 상가가 즐비한 도로 그리고 뒷골목 ]

주차된 배달용트럭 한 편에서 담배연기가 피어오른다. 종수(유아인)는 담배를 피운 후 트럭 화물칸에서 옷더미를 꺼내어 어깨에 메고 대로 위 사람들을 헤치고 의류상가로 들어간다. 마침 행사 중이어서 신나는 음악이 흐르고 입구에는 행사용 애드벌룬이 있고 여성 홍보도우미들이 입구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행사를 홍보 중이다. 종수는 무심하게 상가 안으로 들어가는데 홍보도우미 한 명(전종서, 그녀가 해미다.)이 경품 추첨권을 준다. 그녀는 계속 종수를 주시한다. 배달을 마치고 나온 종수. 입구에서 잠시 쉬려는데 추첨행사에서 그의 번호가 호명되어 추첨에 당첨된다. 번호를 뽑은 것은 추첨권을 주었던 바로 그녀였다. 아마도 그녀의 농간이 있었는지도..

경품을 주면서 그녀가 묻는다. "여자친구 있어?" "여자친구 없는데..", "그럼 어떻게.. 이거 여자용 손목시계인데..이제부터 구해야겠네." 그러고는 그녀는 바로 "이종수! 나 모르겠어? 우리 어릴 때 같은 동네 살았잖아, 파주시 탄현면 마누리", 종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아...", 그러자 그녀는 "나야, 신해미, 나 얼굴 성형했어, 예뻐졌지..? 너 시간있어? 나 금방 쉬는 시간인데"

뒷골목에서 두 사람은 담배를 피운다. 

해미가 종수에게 묻고 종수가 답한다. "군대는?" "군대는 갔다왔지.." "그리고?" "그리고 뭐.. 아...학교도 졸업하고 지금 잠시 알바 뛰고 있는데 사실 뭐 따로 하는 게 있어." "뭐하는데? 물어봐도 돼?" "글 쓰고 있어" "글? 무슨 글?" "소설" "오오 그럼 작가야?" "아직 정식작가는 아니고..진짜 작가가 되려고 하는거지" "작가 이종수."

종수가 해미에게 묻는다. "넌 이거 할만해?" "응 재밌어, 난 이런 일이 좋아. 몸 쓰는 일. 그리고 일이 있다고 전화가 오면 그때 나가면 되니까. 좀 자유가 있어, 그게 좋아", "자꾸 보니까 이제 좀 니가 해미같네.. 이거 너 할래? 아까 받은 거" 해미에게 경품으로 받은 손목시계(영화 후반 해미의 행방을 알게 해 주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를 건네준다. "손목시계 처음 차봐, 아...촌스러워..후훗, 야 우리 이따 저녁에 같이 술이나 먹을까?" "그럴까..."


* 종수는 해미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지만 해미는 종수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계속하여 해미는 어린시절 종수와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고 이를 들려주는데 종수는 그런 기억을 하지 못한다. 해미가 실종된 후 종수는  실종된 해미를 찾는 과정에서 해미가 들려준 기억의 실체를 찾아헤맨다. 해미가 등장할 때까지 종수에게 인생은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불분명한 것이었다. 서서히 종수는 해미를 통하여 '인생'이라는 실체와 마주한다.




[ 장면 2 - 밤. 포장마차 ]

두 사람은 함께 포장마차에 있다. 해미는 곧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그동안 열심히 돈 모았거든. 여행가려고." "왜 하필 아프리카야?" 대답대신 해미는 뭔가를 던지고 받는 행동을 하면서 판토마임을 배우는 중이라고 한다. "배우되려고?" 종수가 묻자 "배우는 아무나 되니? 그냥 재밌어서 배우는거야" 해미는 계속 판토마임을 한다. "봐봐, 내가 먹고 싶을 때 항상 귤을 먹을 수 있어" "잘하네. 재능있네" "이건 재능으로 하는 게 아니야. 뭐냐면 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그게 다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입에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어"

그리고는 "너 그거 알아?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부시맨. 부시맨들에게는 두 종류의 굶주린 자가 있데. 굶주린 자 영어로 '헝거 hunger'. '리틀 헝거 little hunger'와 '그레잇 헝거 great hunger'. 리틀 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잇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래. 우리가 왜 사는지,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거를 늘 알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배가 고픈 사람이라고 그레잇 헝거라고 부른데"


* 판토마임과 헝거. 감독은 이 영화가 앞으로 무엇을 말할 것인해미의 입을 통해 제시한다.

다음 백과사전에서 판토마임은 좁은 의미로는 생활에서 따온 장면들을 풍자적으로 표현했던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오락극을 말하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의미가 확대되어, 하나의 성격을 창조해내고 묘사하는 기술, 또는 사실적이고 상징적인 몸짓으로만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술을 의미하며, 이 용어는 연기와 연기자 모두를 가리킨다고 한다.

해미는 판토마임으로 먹는 것, 배고픔을 채우는 방식에 대하여 얘기한다.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그러면 입에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어..해미가 아프리카에 갔을 때, 해미가 실종된 이후 종수는 해미가 없는 해미의 방에서 해미와 섹스를 한다. 마치 해미가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진짜 해미를 먹는 듯이.

벤은 해미와 종수를 초대한 후 스파게티를 만들면서 요리에 대하여 말할 때 자신이 요리해서 먹는 쾌감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는 욕망을 채우는 보다 주도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을 암시한다.

해미는 또 헝거 굶주림, 배고픔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두 종류의 굶주린 자. 이 영화에는 두 종류의 굶주린 자가 있다. 벤과 종수. 벤은 배가 고프다. 종수도 배가 고프다. 영화에서 벤은 늘 정찬을 먹는 반면, 종수는 늘 빵으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먹는 장면들이 계속 나온다). 벤은 소설가가 되려는 종수에게 묻는다. 어떤 소설가를 좋아하는지, 어떤 소설을 쓸 것인지. 굶주린 자가 또 다른 굶주린 자에게 묻는 것이다. 그의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를.

그런데 판토마임과 헝거는 결국 '실존'의 실체와 닿아 있다.


그리고는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종수에게 자신이 기르고 있는 고양이(영화 후반부 손목시계와 함께 해미의 행방을 추정케 하는 암시가 된다)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한다. "고양이. 아프리카 여행가는 동안 밥 좀 줄 수 있어?" "내가 데려와야 되는건가..?" "아니 니가 우리 집에 와서. 왜냐면 고양이는 사는 곳을 옮기면 안되거든"

잠든 해미(영화에서 종종 해미는 잠이 든다). 종수는 계산을 하고 잠든 해미 옆에 와서 털썩 주저 앉는다. 옆자리에는 청춘남녀가 키스하고 있다.




[ 장면 3 - 화창한 낮. 해미가 살고 있는 집 그리고 해미의 방 ]

햇빛이 맑고 화창한 낮. 종수는 큰 가방을 둘러매고 버스에서 내린다. 정류장에는 해미가 기다리고 있다. 짧은 반바지 차림이다. 함께 비탈 골목을 오른다. "이 짐들 다 뭐야?" 해미가 묻는다. "파주집으로 이사가는 중이야.." "오늘?" "파주집에는 누가 있어?" "아무도 없어. 엄마는 오래 전에 집나갔고 누나는 몇 년 전에 결혼했고 아버지는 혼자 소 키우면서 살고 있었는데 문제가 생겨서 내가 집에 들어가게 생겼어"...해미가 아무것도 묻지 않자 종수가 "무슨 문제인지 안물어보네.." 해미는 답한다. "문제야 항상 있잖아"


* 해미에게 인생이란 따로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냥 존재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라진다. 해미가 말하고 벤이 말한 듯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해미는 존재를 넘어 인생의 의미를 구하지 않는다. 해미가 하는 일은 그 일 자체일 뿐 그 일 너머 어떤 다른 목적이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몸 쓰는 일이 좋아서, 재미있어서 홍보도우미를 하고 판토마임도 배우나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냥 재미있어서 배운다. 왜 하필 아프리카냐고 묻는 종수에게 해미는 답이 없다. 종수의 가정사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도 묻지 않는다. 인생에서 겪는 문제 역시 그냥 '항상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여행을 통하여 해미는 실존과 소멸에 대한 관념을 느낀다. 느낄 뿐이다. 감독은 '해미'라는 메타포를 통하여 인간의 '실존'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해미가 살고 있는 건물은 남산 타워가 보이는 동네 꼭대기에 위치한다. 해미의 방은 그 집의 꼭대기에 있다. 종수는 해미의 방을 오르기 전 계단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 시내 전경을 잠시 바라본다.

해미의 방문을 열자 입구 바로 앞에 싱크대가 놓여 있다. 싱크대 옆 방 안쪽으로 옷장이 있다. 입구 맞은 편으로 창문이 있는데 창문 너머로 남산 타워가 보인다. 침대가 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침대 하나에 작은 테이블 하나. 한 눈에 보아도 비좁은 작은 방에 살림은 조촐하다. 싱크대 대각선으로 입구 문 옆으로 작은 화장실이 있고 그 옆으로 창고로 보이는 좁은 베란다가 있다.

종수가 멋쩍게. "집 좋네..이만하면. 나 전에 살던 방은 싱크대 옆에 변기가 있었는데"

해미는 창가에 서서, "이 집 북향이어서 늘 춥고 어두운데 하루에 딱 한 번. 햇빛이 들어와. 남산 전망대 유리창에 햇빛이 반사되서 여기까지 들어와. 근데 아주 잠깐 들어오기 때문에 진짜 운이 좋아야 볼 수 있어"


* 해미는 햇빛에 관하여 던지듯이 말한다. 해미와 종수의 고향은 파주. 대한민국의 북쪽 거의 끝이다. 영화에서 파주는 춥고 어둡다. 화창한 날도 냉랭하다. 해미가 실존하고 있는 그곳. 해미의 방은 춥고 어둡다. 그런데 해미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그냥 그곳이 춥고 어둡다고 말할 뿐이다. 그런데 어쩌면 해미는 햇빛을 간절히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날마다 남산 전망대 유리창에 햇빛이 반사되기를. 진짜 운이 좋으면 볼 수 있는 바로 그 빛을.


침대로 돌아와서 해미는 고양이를 부른다. "보일아...나와봐.." 종수가 "고양이 이름이 보일이야..?" 묻자, "응, 보일이. 새끼 때 지하보일러실에 버려져서 울고 있는 걸 내가 데려왔거든. 근데 우리 보일이는 낯선 사람이 오면 어딘가에 숨어서 절대 안나와. 자폐증이 심해갖고"

고양이는 나오지 않는다. 소리조차도 없다.

종수가 "혹시 보일이도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거 아니야? 너 없을 때 내가 여기 와서 상상 속 고양이한테 먹이를 줘야 하는거 아니냐구" 하자

해미는 "있지도 않은 고양이한테 밥을 주라고 내가 널 여기까지 불렀다고?...재밌네..." 하고는 웃는다.

다시 종수는 "내가 고양이가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장난 반 진담 반인 듯이 묻는다.


* 영화의 끝까지 해미가 고양이를 실제로 키웠는지, 그러니까 해미의 고양이 보일이가 실존하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추정할 뿐이다. 벤이 해미를 죽이고 어딘가로 치워버린 후 해미의 고양이 보일이를 데려왔다고 추정할 뿐. 벤의 집에 있는 그 고양이가 해미의 고양이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감독은 해미를 통하여 관객들에게 수수께끼를 던진다. 해미가 말한 그 고양이, 해미의 고양이 보일이는 실존하는가, 벤의 그 고양이가 해미의 고양이일까. 고양이가 실존하고 벤의 그 고양이가 해미의 고양이라면... 벤은 살인자다. 살인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벤의 그 고양이가 해미의 고양이가 아니라면. 애당초 보일이는 존재하지 않았다면...벤이 살인자임을 장담할 수 있을까...


해미는 침대에 앉아 종수를 응시한다. "너 기억나? 옛날에 나 못생겼다고 한 거"  "정말 내가 그랬었다고?"  "어느날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데 갑자기 너가 길을 건너오더니 그렇게 말했잖아. 너 진짜 못생겼다고. 니가 중학교 다닐 때 나한테 한 유일한 말이었어. 이제 진실을 얘기해봐...왜 말을 못해?"

해미는 종수에게 키스를 하고 두 사람은 섹스를 시작한다. 종수는 해미와 관계하면서 벽에 비친 빛을 본다. 빛을 따라 해미의 방 창문 밖으로 남산 전망대가 보인다. 빛은 잠시 반짝이더니 이내 사라진다.


* 종수에게 해미는 그 빛과 같다. 잠시 반짝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 빛은 남산 전망대에 반사된 빛이다. 진짜가 아닌 가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진짜 운이 좋으면 가짜 빛을 통해 진짜 빛을 볼 수 있다. 해미의 집에서 남산 전망대를 볼 수 있다. 남산 전망대에서는 서울시를 조망할 수 있다. 종수는 해미를 통해 인생의 실체와 마주하고 욕망이 들끓는 세상을 본다.


            - 버닝 감상평 2 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