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등 감상평

이창동 감독의 버닝 후기 감상평 2 - 장면별정리 + 나름의 해석

조앤디디온 2018. 12. 20. 12:44

 

 

 

 

 

[ 장면 4 - 파주 종수네 집 ]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파주집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타악기의 두드림이 울리는 재즈풍의 테마곡이 흐른다.

종수는 파주 집.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집으로 돌아간다. 집 안. 흐트러진 집기들. 온통 쓰레기로 가득한 것 같다. 쾌쾌한 냄새가 나는 듯 종수는  코를 킁킁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린다. 종수의 시선을 따라, 종수의 아버지 사진이 포착된다. 사진 속 종수의 아버지는 군복무를 하고 산업현장에서 땀을 흘리기도 했다. 당당하고 자신 있다. 종수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 자신을 무등 태우고 있는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그리고는 집 밖으로 나와 축사를 둘러본다. 멀지만 가까운 듯, 남측의 대북방송인지, 북측의 대남방송인지 모호한 방송이 계속된다. 종수의 집은 혼돈 그 자체다.

밤. 전화벨이 울린다. 종수가 받아 보지만 그냥 끊긴다. 종수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어둑한 하늘 황량한 들판을 바라본다.

 

날이 바뀌고 종수는 밥을 먹고 있다. TV에서는 청년실업률에 관한 뉴스, 미국 트럼프대통령에 관한 뉴스가 이어진다. 전화벨이 다시 울린다. 받으니까 또 끊긴다. 종수는 밖으로 나가 낡은 트럭(아버지의 트럭일 것이다)에 올라타 시동을 걸어본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려 창고로 간다. 아버지의 창고. 여러 가지 물건. 아마도 그 물건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축적된 시간일 것이다. 창고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종수는 한 곳을 응시한다. 아버지의 금고. 금고의 문을 열자 그 안에는 종류별로 칼이 진열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칼이 아닌 수집용 칼로 보인다. 혼돈의 그 곳(아버지의 집)에서 유일하게 질서가 주어진 공간(아버지의 금고 안 칼)이었다.

 

* 종수의 인생은 아버지의 인생과 닿아 있다. 사회는 어느 사이 구조적으로 계층간 이동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부를 축적한 이들이 그 다음 세대로 부를 이어가면서 이를 기초로 더 큰 부를 쌓는다. 반면 가난 역시 점차 고착되어 부모의 빈곤은 곧 자식의 빈곤으로 이어진다. 이는 자본주의의 필연인지 모른다. 

더욱 종수는 아버지의 그것에 갇혀 있다. 아버지의 인생,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종수가 벤을 죽이는 도구는 칼이다. 아마도 창고 금고에 있는 아버지의 그 칼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종수는 아버지의 그 칼로 벤을 찌른다. 계속해서 벤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을 때까지. 벤은 자신의 노력이 아닌 아마도 그 부모 내지 조부모 내지 그 이상의 어딘가 직계로부터 세습된 부를 누린다. 종수는 아버지의 칼로 벤을 단죄하는데, 나는 여기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종수가 아버지의 창고 속 금고 안 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벤을 죽이는 장면의 전조이다.

 

[ 장면 5 - 다시 해미의 집 ]

종수는 해미의 집이 있는 건물 층계참에서 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 시내 전경을 바라보다가 해미의 방으로 들어간다.  종수는 "보일아..." 고양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방 안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고양이를 찾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소리도 없다. 다만 배설물만이 고양이의 존재를 알려준다. 고양이의 밥과 물을 챙긴 후 종수는 창 밖 남산타워 전망대를 응시하고 벽에 붙어 있는 해미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자위행위를 한다. 카메라는 창문 밖에서 해미의 방에 있는 종수를 응시한다.

 

* 영화에서 종수가 유일하게 경계를 풀고 친밀감을 나타내는 존재는 동물이다. 고양이는 해미의 것이고 어린 소는 아버지의 것이다. 해미 대신에 밥을 주러 해미 집에 갈 때마다 종수는 보일이를 불러 본다. 해미의 실종 이후 벤의 집에서 고양이를 보았을 때 종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고양이가 보일이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고양이 역시 이름을 부르는 종수를 기억했는지 종수에게 반응한다. 아버지에 대하여 실형이 선고되고 집을 정리하면서 벤을 단죄하기 전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아버지의 소를 처분하는 것이었다. 소는 집을 떠나면서 슬프게 운다.

 

[ 장면 6 - 법원 및 변호사사무실. 종수 아버지의 재판 ]

종수는 법원 아버지의 재판이 열리고 있는 법정 안으로 들어간다. 법정 안에는 재판을 담당하고 있는 판사들과 담당 법원공무원 그리고 검사, 피고인인 종수의 아버지(현 MBC사장인 최승호PD가 연기한다)와 그의 변호인인 변호사(문성근)만이 있을 뿐이다. 종수는 텅 빈 방청석 어느 한 자리에 앉는다. 검사는 "피고인은 2017. 7. 20. 파주시청 공무원에게 의자를 휘둘러 정당한 공무를 방해함과 동시에...상해를 가하였다.." 등의 공소사실을 낭독하고 변호인인 변호사는 피고인이 모든 공소사실을 인정하고 있다고 답변한다. 재판장이 발언 기회를 주었음에도 피고인인 종수의 아버지는 방청석에 있는 종수만을 쳐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침묵이 흐른다.

 

변호사사무실(문성근은 세속적인 변호사의 연기를 능글맞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짧지만 인상적이다. 그의 연기 내공을 알 수 있다).

변호사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다리를 흔들고 있다. 종수에게 학교를 마쳤는지, 취직은 하였는지, 전공은 뭔지 등을 묻는다. 종수가 문예창작을 전공했다고 하자 어떤 글을 쓸 것인지 묻는다. 종수가 소설을 쓸 거라고 하자, "아버지에 대해 쓰는 거 어때? 내가 보기에 니 아버지야말로 소설의 주인공 같은 사람인데. 파란만장하잖아. 인생이. 진짜 또라이였다. 원래 또라이가 소설의 주인공되잖아. 파주 제일고 전체에서 1등이었어. 성적말고 자존심이. 아...중동에서 개고생하고 왔을 때 내가 그랬다. 그 돈가지고 강남 어딘가 가서 아파트 한 채 사두라고.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안한데. 그 자존심 때문에. 그리고 고향에서 무슨 축산업한다 어쩐다 하면서 다 말아먹고 저렇게 됐잖아. 지금도 그래. 피해자한테 싹싹빌고 반성문쓰고 판사한테 탄원서 올리고 그래야 집행유예라도 받을 수 있는데 안한다잖아. 고집부리고. 말 안들어요. 그래서 오라고 한 거야. 아버지 면회가서 말씀드려봐. 성질 죽이고 반성문 좀 쓰라고. 내일이라도 당장. 응? 알았지?"

 

* 변호사의 대사를 통하여 우리는 종수 아버지의 성격적 기질을 알 수 있다. 세상은 적절히 타협하고 치고 빠질 줄 아는 처세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능숙한 사람은 자본주의 체계에 순응하면서 자본이 주는 안락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종수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고집스러울 정도로 타협할 줄 모르는 기질적 성품을 타고난 인물로 설명되고 있다. 고교동창인 듯한 변호사는 말한다. 파주 제일고 전체에서 1등이었다고. 성적이 아니라 자존심으로. 그리고 그 자존심 때문에 결국 이렇게 되었다고.

종수의 아버지가 공무원에게 의자를 던진 이유를 알 수 없다. 법을 위반한 사실로 재판을 받고 있지만 그의 행동에 대한 설명은 없다. 법정에서 변호사도 피고인인 종수의 아버지도 어떠한 변명 내지 경위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냥 법을 위반하여 재판을 받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종수의 아버지는 피해자에게 빌지도, 판사에게 탄원서를 올리지도, 심지어 반성문도 쓰지 않는다. 법을 위반하였다고 하여 그 행동의 정당성이 무조건 부정된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막연하게 종수 아버지의 세계 안에서 그는 스스로 잘못이 없는 정당한 행동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타협하지 않는 기질. 어쩌면 종수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마지막. 해미를 찾기 위해 법질서에 편승하지 않는 종수의 선택은 그의 부친의 또 다른 변주로 보인다.

 

[ 장면 7 - 해미 집 ]

종수는 해미 집으로 가서 고양이 밥을 챙겨준다. "안녕...나 또 왔어. 오늘도 얼굴 안 보여주냐. 며칠이나 지났는데?" 고양이를 찾아보지만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종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침대에 눕는다. 잠시 후 창가에 서서 창 밖 남산타워 전망대를 바라보면서 다시 자위행위를 한다. 갑자기 휴대폰 벨이 울린다. 받아보니 해미였다. "끊어질지도 몰라..케냐 나이로비. 3일 동안 공항에 갇혀 있었어. 여긴 이런 일이 자주 있나봐.." 해미는 공항으로 마중을 나와달라고 부탁한다. 종수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답한다.

 

 

 

 

 

 

[장면 8 - 오후. 공항, 벤의 등장 ]

종수는 공항으로 간다. 해미를 만날 생각에 설레는 얼굴이다. 그런데 정작 해미는 혼자가 아니다. 말끔하게 생긴 남자와 함께 약간은 들뜬 얼굴이다. 해미는 그를 나이로비 동지라고, 나이로비 공항에서 3일 동안 함께 있었다고 소개한다. 그의 이름은 벤(스티븐 연). 해미는 비행기에서 자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하면서 곱창전골이 먹고 싶다고 한다. 벤은 서울에서 곱창전골을 제일 맛있게 하는 집을 알고 있다고 하고 세사람은 함께 종수의 트럭(아버지의 그 트럭)을 타고 이동한다. 벤은 트럭 뒷자리에 앉아 어머니와 통화하는데 그는 친구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고 하면서 친구의 차를 타고 가는 중이라고 너스레를 부린다. 벤은 처음만난 종수가 낯설지 않은 듯 편안하다. 카메라는 트럭 앞좌석에 앉은 종수와 해미를 그리고 트럭의 뒷좌석에서 편안히 앉아 있는 벤을 한 구도에 잡는다. 트럭 뒷좌석 창문 너머로 멀리 석양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이 비추인다.

 

* 처음 세 사람이 만난 그 자리에서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벤이 등장하기 전까지 영화의 중심은 종수와 해미였다. 해미는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던지는 인물로서 뚜렷한 존재감이 있었다. 그런데 벤과 함께 등장한 해미는 어딘가 종전의 해미가 아니다. 영화는 벤의 등장 이후 그 중심축을 종수와 벤으로 옮긴다. 해미는 종수와 벤의 욕망의 대상 내지 실존에 대한 증거 내지 객체로 전이된다.

세 사람이 함께 탄 트럭 뒤로 석양이 지는 해가 비추이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벤을 처단하고 벌거벗은 체로 트럭을 몰고 있는 종수의 뒤로 벤의 승용차가 불타오르는 장면과 연결된다.

 

[ 장면 9 - 밤. 곱창집 ]

해미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서, "칼라하리 사막 가는 길에 선셋투어라는 코스가 있더라구. 사막에 해지는 걸 보여주는 거래. 갔더니 그냥 주차장 같은 데야.. 아무것도 없고.. 관광객들이 버린 쓰레기만 가득 쌓여 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 같이 왔는데 나만 혼자잖아.. 정말 거기 있으니까 혼자라는 생각이 너무 드는거야... 나는 혼자. 여기까지 뭐하러 왔나 싶고.. 그런데..해가 지는거야. 저기 끝없는 모래 지평선에 노을이 지는거야. 처음에는 주황색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피 같은 붉은색이었다가 그러면서 점점 어두워지면서 노을이 사라지는데 갑자기 막 눈물이 나는거야..." 해미는 자신의 말에 도취되어 울먹인다. "아! 내가 세상의 끝에 왔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 죽는 건 너무 무섭고 그냥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 있었음 좋겠다..." 해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해미의 손목에는 종수가 준 분홍색 손목시계가 있다.

 

* 해미는 말한다. 세상의 끝에서 지는 해를 마주한 그 때.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그냥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그런데 지금도 답이 없다. 해미는 왜 아프리카를 갔던 것일까.. 죽는 건 너무 무섭고.. 해미는 삶 자체에 큰 기대가 없어 보인다. 그냥 존재하니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사는 삶이 의미가 없다.. 어쩌면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든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냥 사라지고 싶다.. 그런 해미 앞에 벤이 등장한다. 그는 태워 없앨 낡고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찾고 있다..

 

 

 

 

그런 해미를 보면서 갑자기 벤이 툭! 던지듯이 말한다. "난 사람이 눈물 흘리는 게 신기해"

해미는 눈물을 닦으며 말한다. "신기해? 왜요?"  벤은 답한다. "왜냐면 난 눈물을 흘리고 울어본 적이 없거든. 아주 어렸을 땐 그랬을텐데, 내 기억 속에서 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어요"  해미는 놀라운 듯 "진짜 신기하다."

물끄러미 두 사람을 바라보던 종수가 묻는다. "그래도 슬픈 감정은 느끼시잖아요"  벤은 답한다. "그럴지도 모르죠. 눈물이라는 증거가 없으니 그게 슬픈 감정인지 모르죠"

종수는 이어서 묻는다. "혹시 무슨 일 하는지 물어도 돼요?" 벤은 답한다. "그냥...이것저것 해요. 얘기해도 잘 모르실건데, 간단히 말하면.. 그냥. 노는 거예요" 종수는 의아하다. "놀아요?" 벤은 아무렇지도 않다. "예. 요즘은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이 구분이 없어졌거든요"

 

*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는 사람. 그는 사이코패스 내지 소시오패스일까. 영화적 설정은 이를 암시한다. 슬픈 감정은 느끼지 않느냐고 묻는 종수에게 벤은 눈물이라는 증거가 없으니 슬픈 감정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는 일도 알 수 없다. 영화는 끝까지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의 직업에 대해 침묵한다. 영화에서 벤은 카페에서 여자를 만나고 책을 보고 지인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낸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에게는 상당한 재산이 있다는 것이다.

 

벤이 묻는다. "종수씨는 혹시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 물어도 돼요?" 종수가 답한다. "윌리엄 포크너요" 벤은 "아...포크너..." 종수는 계속 말한다. "포크너 소설을 읽으면 내 얘기 같다 싶을 때가 있거든요" 벤은 흥미 있다는 듯이 "종수씨가 소설을 쓴다니까 나도 언제 종수씨하고 얘기 좀 하고 싶네요. 내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해미는 잠들어 있다. 벤은 잠든 해미를 보면서 "귀엽죠..졸리면 장소 안가리고 그냥 잠들어요. 10초도 안걸려"

해미는 한 마리 작은 짐승처럼 잠들어 있다.

 

벤은 자신의 차를 가지고 온 남성과 나가서 얘기를 나누는데 차에 관해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운전은 괜찮았어..?' '예...밟았다 땠다...' 벤이 계산하는 사이 종수는 해미를 바라본다.

종수가 해미를 깨워서 데리고 나왔는데 종수의 트럭 뒤로 포르쉐가 주차되어 있다. 벤이 해미를 데려다주겠다고 하고 해미는 종수의 눈치를 살피면서 그의 차에 탄다. 종수는 벤과 해미가 포르쉐를 타고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종수는 어두운 밤 트럭을 몰고 파주집으로 돌아간다.

 

            - 버닝 감상평 3 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