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등 감상평

이창동 감독의 버닝 후기 감상평 4 - 장면별정리 + 나름의 해석

조앤디디온 2018. 12. 23. 20:00

 

[ 장면 14 - 종수 집 ]

한낮에서 오후 사이. 종수는 축사를 청소 중이다. 아마도 소의 배설물을 치우고 있는 중인 것 같다. "어린 송아지가 부뚜막에 앉아 울고 있어요!" 노래를 부른다. 소리를 지르듯이 악을 쓴다. 휴대전화가 울린다. 해미다. 집이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벤과 함께 그쪽으로 가고 있다고 한다. 근처를 지나다가 해미가 옛날 살던 데라니까 벤이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해서 가고 있다고 한다.





얼마 후 벤의 포르쉐가 종수의 집을 향해 좁은 도로를 달려온다. 벤은 종수의 집 마당에 차를 세우고 내린다. 먼 듯 가까운 듯 들리는 소리. 벤이 묻는다. "이거 무슨 소리예요?" 종수가 답한다. "북한에서 대남방송 스피커 튼 거예요" 해미도 거든다. "저 너머가 북한이잖아" 벤은 예사의 그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아...재밌네"

해미는 약간은 무심한 표정으로 "내가 살던 집이 없어져서 섭섭하네. 저기저기였는데.. 흔적도 없어졌어. 그리고...우물도 없어졌더라. 우리집 옆에 우물이 하나 있었잖아. 나 어릴 때 거기에 빠졌었는데. 너 기억나?" 종수는 대답 대신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멍한 표정을 보낸다. 대신에 벤이 해미에게 묻는다. "우물에 빠졌었다고? 몇살 때?" 해미가 답한다. "일곱살 때인가.. 혼자 놀다가 거기에 빠져 가지고 우물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면서 몇 시간 동안 울고 있었어. 아무도 날 못보면 죽는구나 싶어서 너무 무서웠는데.. 얘 얼굴이 딱 보이는거야. 그때 종수가 날 발견해서 구출됐지. 그런데...기억도 못하네.." 해미의 표정에 서운한 빛이 역력하다.


* 종수의 파주 집에는 계속해서 대남방송이 들린다. 분단된 국가. 저 너머가 북한이잖아.. 해미와 종수는 분단된 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들이 어릴 때부터 들었던 대남방송은 그들이 분단된 국가에서 살고 있다는 현실을 언제나 자각시켜 주었다. 그런데 벤에게 분단은 현실 저 너머에 있다. 벤이 살고 있는 곳에서 분단은 어쩌면 상관이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벤은 답한다. 아..재밌네...

* 해미는 어릴 때 우물에 빠졌었다. 혼자 놀다가. 우물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면서 몇 시간 동안 울고 있었다고..죽는구나 싶어서 너무 무서웠다고..그때 종수가 나타나서 구출됐다고...종수는 기억하지 못한다. 해미의 얘기는 사실일까.. 종수는 해미가 실종된 이후 우물을 찾아다닌다. 정말 우물이 있었는지 확인하려고 한다. 우물의 존재를 확증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물이 존재했다는 것은 해미의 기억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되고 우물에 빠져 혼자 울고 있는 어린 해미를 종수는 구해주고 싶다. 해미를 다시는 혼자두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해미가 실종된 후 끈질기게 해미를 찾게 되는 이유는 바로 해미가 들려준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은 아닐는지...





"먹을 것을 좀 사왔어요.." 벤이 말하자, 함께 마당에 의자를 놓고 작은 테이블도 놓는다. 해미는 종수의 집 안으로 들어가 둘러본다. "꼭 우리집에 온 것 같네.. 옛날 집..."

종수, 해미, 벤 세 사람은 마당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 있다. 해가 지는 어스름 저녁. 벤이 말한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네요.." 해미가 말한다. "소똥 냄새가 좀 나서 그렇지" 다같이 웃는다. 해미는 미소지으며 말한다. "좋다. 오늘이 제일 좋은 날 같애.." 다함께 들판 너머 지는 석양을 바라본다. 벤이 불쑥 말한다. "나 지금 떨(대마초의 속어)하고 싶은데 같이 할래요?" 종수가 묻는다. "떨이요?" 벤이 답한다. "대마초요" 해미가 끼어든다. "난 그거 피우면 자꾸 웃음이 나"

벤이 대마초를 붙여서 해미에게, 해미가 다시 종수에게 준다. 종수는 한 모금 빨자 기침을 한다. 해미가 웃는다. 벤은 무표정하다. 조금 지나자 종수와 해미가 대마초를 주고받으며 피운다.

해미가 갑자기 일어선다. 마당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더니 어두워진 하늘 석양을 향해 팔을 뻗는다. 그리고 웃옷을 벗는다. 알몸이 된 상반신으로 춤을 춘다. 새가 나는 듯. 팔을 올렸다 내렸다. 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날듯이. 그러다 울음을 터뜨린다.

어두워진 하늘. 나무는 짙은 그림자로 서있다. 종수와 벤이 함께 잠들어 쓰러진 해미를 집 안으로 옮긴다. 소파 위에 해미를 눕히고는 벤은 낄낄거린다. 종수는 잠든 해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당에 나란히 앉아 벤과 종수는 어두워진 대지를, 아직은 해가 지지 않은 하늘을 무심히 바라본다. 주위는 온통 푸른 파스텔톤이다.

종수는 토해내듯 말한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해요. 우리 아버지는요.. 분노조절장애가 있어요. 가슴 속에 무슨 분노가 있어서 그게 폭탄처럼 터져요. 한 번 터지면 모든 게 다 부서져요. 엄마가 우리 남매를 두고 집을 나간 것은 그것 때문이었어요. 엄마가 집을 나간 날 내가 엄마의 옷을 태웠어요. 저 마당에 불을 지펴놓고 아버지가 시켰어요. 내 손으로 직접 태우라고. 난 지금도 그때 꿈을 꿔요.."

벤은 종수의 이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고백하듯이 말한다. "난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워요.." 종수가 의아해서 묻는다. "뭐라구요?" 벤은 상관없다는 듯이 계속 말한다.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요.. 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어요. 들판에 버려진 낡은 비닐하우스 하나를 골라서 태우는 거예요. 두달에 한번쯤? 그 정도 페이스가 제일 좋은 거 같아요. 나 한테는"  벤은 미소짓는다.

종수는 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묻는다. "페이스요? 그러니까 남의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건가요?"

벤은 덤덤하게 대답한다. "당연히 남의 거죠. 말하자면 범죄행위죠..종수씨와 내가 이렇게 대마초를 피우는 것처럼. 명백한 범죄행위. 그런데 아주 간단해요. 진짜. 석유를 뿌리고 성냥불만 던지면 끝! 다 타는 데까지 10분도 안 걸려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게 할 수 있어요."

종수가 "잡히면 어쩌려고.." 말하지만,

벤은 "하..안 잡혀요..절대. 한국 경찰이 그런데 신경 안쓰거든요. 한국에는요.. 비닐하우스들이 진짜 많아요..쓸모없고 지저분해서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들. 걔네들은 다 내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거 같아요. 그리고.. 난 그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거죠.." 벤은 손바닥을 펴서 가슴을 툭툭 친다. "그러면 여기서 베이스가 느껴져요..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후훗" 웃음을 토한다.

종수는 진지하게 묻는다. "그게 쓸모없고 불필요한 건지는 형이 판단하는 건가요?"

벤이 즐기듯이 답한다. "으음...난 판단같은 거 하지 않아요. 그냥 받아들이는 거지. 그것들이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벤은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인 후 계속 말한다. "그건 비 같은 거예요. 비가 온다. 강이 넘치고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떠내려간다..." 벤은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다는 듯이 잠시 낄낄거리고는 계속 말한다. "비가 판단을 해? 거기에 옳고 그른 건 없어요. 자연의 도덕만 있지. 자연의 도덕이란 동시존재 같은 거예요."

무심한 하늘. 어둠이 깔린 대지와 아직 푸른 하늘이 대조적이다.

"동시존재요?" 종수가 묻자,

벤은 계속해서 말한다. "난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 난 파주에도 있고 반포에도 있다. 서울에도 있고 아프리카에도 있다.. 그런 거.. 그런 발란스?" 하고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다.

종수는 "그럼 제일 최근에 태운 건 언제였는데요?"

벤이 답한다. "아, 그게...아프리카 가기 직전이었으니까 . 한 두달 됐네.. 이제 태울 때가 됐다는 얘기지"

종수가 "다음에 태울 비닐하우스도 벌써 정해졌겠네요"

벤은 무심하게 답한다. "응. 정해졌지..아주 태우기 좋은 거. 오랜만에 태우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 사실, 오늘 사전답사 온 거예요"

종수는 놀란 듯이 "사전답사? 그럼 이 근처에 있는 거예요?"

벤은 속삭이듯이 답한다. "예..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어요..아주아주 가까운 곳"


종수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나는 해미를 사랑하고 있어요"

벤이 비웃듯이 웃어버리자 종수는 "씨발! 난 해미를 사랑한다고!" 벤은 계속 비웃는다.

해미가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온다. 서서 물끄러미 들판을 바라본다. 해미의 시선을 따라 종수 집 마당 앞에 펼쳐진 들판과 멀리 달리는 차들의 불빛이 있는 도로 그리고 다시 종수 집 마당의 나무. 하늘 위로 그림자처럼 가지가 흔들리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는 해미 뒤로 종수가 다가온다.

해미가 종수에게 말한다. "나무 많이 컸네.." 종수는 해미의 등 뒤에서 싸늘하게 말한다. "너 왜 그렇게 옷을 잘 벗어! 창녀나 옷을 그렇게 벗는거야" 벤이 포르쉐에 시동을 걸고 해미는 말 없이 벤의 차에 오른다.

종수는 벤에게 "이제 비닐하우스들 잘 살펴봐야겠네요" 하자 벤은 "그러세요..아주 가까이 있는 거" 라고 하고는 웃음을 흘린다.

포르쉐가 마당을 빠져나가 길을 따라 사라진다.





[ 장면 15 - 종수의 꿈 ]

비닐하우스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어린 남자아이가 웃옷을 벗은 체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바라보고 있다. 살짝 미소짓는다.

아침 소파 위에서 잠든 종수가 눈을 뜬다. 북측의 대남방송이 계속 들린다. 종수는 밖으로 나와 지난 저녁 함께 저녁을 나누었던 작은 테이블을 바라본다. 테이블 위에는 와인병과 접시 등이 있다. 종수는 테이블 위 벤이 두고 간 라이터를 집어 들어 불을 켜본다.


* 나는 이 영화에서 두 번의 클라이맥스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하나의 클라이맥스가 바로 이 시퀀스이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전조로 가득한 대사들. 해미는 종수에게 과거의 기억을 말하고, 이는 곧 앞으로 해미에게 닥칠 상황에서 종수에게 남기는 메시지가 된다. 벤은 그동안 길들여온 먹잇감을 사냥하기 직전 마치 전야제를 베풀 듯 종수의 집 마당에서 한바탕 축제를 벌인다. 그리고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비밀을 털어놓는다.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그때 느끼는 베이스의 짜릿함에 대해서. 두달에 한 번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이제 태울 때가 되었다고..오랜만에 태우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고..종수 가까이 아주아주 가까이에 있다고..그에게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종수의 고백 따위는 귀담아 들을 가치가 없다. 종수가 해미를 사랑한다고 절규하지만 벤은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벤은 말한다. 판단같은 거는 하지 않는다고. 그냥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사람들이 떠내려가듯이. 동시존재 같은 거라고..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흔히 현상에 대하여 우연을 말한다. 우연. 삶과 죽음에 의미나 목적은 없다. 자연현상처럼 존재할 뿐이다. 이유는 없다. 벤은 삶과 죽음에 대해. 자신의 행동에 대해 판단은 필요없다고 말한다. 그냥 우연처럼, 자연현상처럼 일어날 뿐이다.

첫번째 클라이맥스를 지나 영화는 새로운 구도로 진행된다.


                    - 감상평 5 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