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 16 - 낮. 공장 ]
화창한 날. 공장 마당에는 지게차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공장 입구에 청년들이 흩어져 있다. 종수는 한켠에서 해미에게 전화를 건다. 해미의 전화는 통화음만 울리다가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된다. "해미야..통화좀 해..." 종수는 메시지를 남긴다.
공장 안. 취업을 위하여 온 청년들이 줄을 서서 감독자를 기다린다. 감독자는 자신 있는 걸음으로 다가와서 순서대로 번호를 부르라고 한다. 1, 2, 3...7번 번호 끝.
감독자는 순서대로 번호를 부르고는 간단한 질문을 던진다. "집이 어딥니까?", "야근. 특근 가능합니까?"
종수는 3번이다. 종수 바로 앞 2번이 부천에 산다고 하자 감독자는 부천에서 여기까지 2시간 거리인데 어떻게 다니냐며 가능하겠냐고 힐난조로 말한다. 2번은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다고 애써 힘주어 말한다. 감독자는 2번의 대답은 듣지도 않는다. 3번. 종수 차례다. "집이 어딥니까?" 종수는 물끄러미 감독자를 바라본다. 대답이 없다. 그리고는 그냥 나가버린다. 감독자는 상관 없다는 듯 4번을 부른다. "집이 어딥니까.. 야근이나 특근 가능합니까..?" 4번은 답한다. "예! 할 수 있습니다!"
[장면 17 - 종수 트럭 파주 이곳저곳, 그리고 해미 집 ]
종수는 트럭을 운전하면서 논길을 따라 달린다. 허름한 비닐하우스를 살핀다.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하고 낡은 지도책을 꺼내어 무언가를 확인한다. 다시 비닐하우스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난다. 어느 외딴 집. 허름한 비닐하우스가 있다. 종수는 차에서 내려 비닐하우스를 살핀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린다. 해미의 번호가 뜬다. 통화연결이 되었지만 해미의 말소리 없이 도로 위 차가 지나는 듯한 소음. 누군가 도망치듯 뛰는 소음. 다가오는 걸음소리...그러다 끊기고 만다.
종수는 트럭을 몰아 해미집으로 간다.
해미의 집문을 열려고 자기가 알고 있는 비밀번호를 누르지만 열리지 않는다. 파주집으로 돌아와 다시 해미에게 전화를 건다. 이번에는 통화연결음 없이 자동으로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된다.
종수는 새벽 어스름 안개를 뚫고 집 주변 여기저기를 헤맨다. 달리고 또 달리면서 비닐하우스들을 살핀다. 어제 그 외딴 집의 비닐하우스를 다시 가본다. 주인이 나와서 이상하다는 듯이 뭐하냐고 묻는다. 종수는 계속 추수가 끝난 벌판 위 낡은 비닐하우스들을 기웃거린다. 해미의 휴대폰은 계속 꺼진 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될 뿐이다.
다시 해미집. 종수는 문을 세차게 두드리며 해미를 부른다. 임대인인 주인아주머니가 와서 어찌된 영문인지를 살핀다. 종수는 해미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고양이 밥을 주어야 한다며 고양이가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주인아주머니는 전혀 뜻밖이라는 듯이 "고양이가 어디있다고 그래...여기서는 고양이 못키우게 되어 있는데..." 종수는 완강하게 답한다. "아니요. 있어요! 고양이. 고양이 밥을 줬었어요.." 종수는 주인아주머니에게 마스터키로 해미의 집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한다.
해미의 집 안. 깨끗하다. 너무나 깨끗이 치워져있다. 주인아주머니는 "고양이가 어디 있다고 그래..? 어디 여행이라고 간 모양이네..방도 깨끗하게 정리해놓고..." 종수가 말한다. "청소하고 다니는 애가 아니예요.." 화장실 옆 방 안쪽 창고처럼 쓰이는 베란다 문을 열어본다. 거기 해미의 여행용 케리어가 그대로 있다. "여행간 거 아닌 거 같은데요.."
* 해미의 고양이는 실재할까.. 여전한 의문. 주인아주머니는 고양이를 모른다. 그런데도 종수는 어느덧 확신한다. 한 번도 고양이를 보지 못했고 심지어 고양이 소리조차 듣지 못했음에도 확신한다. 감독은 여전히 독자에게 질문한다. 해미의 고양이는 실재할까...이는 우물의 존재와 함께 종수가 풀어야할 수수께끼가 된다.
[ 장면 18 - 어느 도로 위 그리고 판토마임 연습실 ]
한낮. 종수는 행사도우미 의상을 입은 비교적 나이가 들어보이는 여성과 도로 위에서 함께 담배를 피운다. 건너편으로 행사도우미들이 음악소리에 맞춰 춤을 추면서 홍보 중이다.
"쟤네들 저래보여도 속은 아무도 몰라요. 카드빚 있는 애들도 많구요. 그 빚 때문에 있다가 그냥 도망치는거예요. 신해미도 어느날부터인가 전화기가 꺼져있는 거예요.." 여성은 억울하다는 듯이 계속 말한다. "사실...여자들은요..돈 쓸 데가 정말 많아요. 여자는 힘들다고요! 아니, 화장하면 화장했다고 뭐라하고, 안하면 안했다고 뭐라하고. 옷이 좀 야하면 야하다고 뭐라하고. 대충 입으면 대충 입었다고 뭐라하고. 그런 말 아세요..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자기가 말해놓고 멎쩍었는지 '푸훗!' 웃는다.
종수는 해미가 배운다고 했던 판토마임 연습실을 찾는다. 사람들은 판토마임을 연습 중이다. 검은 천이 사방에 어둠을 드리우고 있다. 거울에 비친 사람들은 소리없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종수가 들어가자 그들 중 한면이 종수에게 다가온다. 종수는 조용히 해미의 행방을 묻지만 그는 모른다는 듯 몸짓을 하고는 다시 일행 곁으로 돌아간다.
종수는 다시 낡은 비닐하우스들을 찾아다닌다. 어느 비닐하우스. 종수는 벤의 라이터로 불을 붙여본다. 불이 붙자 황급히 불어서 끈다.
* 종수의 집 마당에서 식사를 한 그 날 이후로 해미는 사라졌다. 행방이 묘연하다. 해미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종수는 해미에게 계속 연락을 취해보고 해미가 있을 법한 집과 예전 직장 등을 찾아다니지만 알 길이 없다. 그러면서도 종수는 다른 한 편 파주 자신의 집 근처 비닐하우스들을 찾아다닌다. 벤이 말한 비닐하우스들을. 종수는 벤이 자신에게 들려준 말에서 해미의 행방에 관한 어떤 것을 직감했는지 모른다.
* 종수가 만난 홍보도우미의 대사가 걸린다.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나오는 살인마는 사람을 죽일 때 그에게 동전을 던지도록 한 후 동전의 어느 면이 나오는지에 그의 운명을 걸도록 하고 그 원칙에 따른다. 이는 벤이 종수 집 마당에서 나눈 대화 중 동시존재의 법칙을 얘기하면서 인간의 삶이 결국 우연 내지 자연법칙과 같은 몰가치적 원칙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인데, 이창동감독이 의도적으로 위 영화를 비틀어 언급한 것은 아닌가 싶다.
[ 장면 19 - 한낮. 어느 카페 ]
햇빛 비치는 카페 창가에 벤이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종수가 들어선다. 벤은 여기 웬일이냐고 묻고 종수는 마치 우연인 듯이 일 때문에 지나다가 벤의 차(포르쉐)를 보고 들어왔다고 말한다. "...혹시나 했는데...맞네요"
벤이 묻는다. "종수씨 소설은 계속 쓰세요?" 종수 "쓰려고 노력은 해요" 벤은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을 가리키며 "전에 종수씨가 포크너 좋아한다고 해서 나도 한 번 읽어보고 싶었어요.." 종수는 책으로 시선을 준 뒤 곧바로 벤을 바라본다. "참, 안 그래도 궁금한 게 있었는데, 비닐하우스는 어떻게 되었어요?" 묻는다. 벤은 "으응..비닐하우스..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구나. 물론! 태웠죠. 깨끗하게 태웠어요..태운다고 했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답한다..
종수가 이어서 묻는다. "우리집 근처에서요? 언제요?" 벤은 "그럼요..아주 가까운 데서. 그날 거기 갔다가 하루인가 이틀 뒤에"
종수는 무심한 듯이 말한다. "이상하네..그날 왔다가신 후로 제가 매일 아침 확인했거든요. 우리집 근처 비닐하우스란 비닐하우스는 다 다니면서 확인했는데.." 벤이 놀란듯 "비닐하우스를 매일 확인했다구요?" "예. 하나도 빠짐없이. 정말 태운 게 있었으면 제가 못봤을 수가 없는데"
"그래도 놓치셨네. 그럴 수 있죠..너무 가까워서 놓쳤을거예요" 종수는 종지부를 찍듯이. "아닌데. 정말 이상하네요" 벤은 "너무 가까우면 안보일 수 있어요.." 이때 한 여성이 황급히 카페로 들어와서 벤의 곁으로 다가온다. 해미 또래와 비슷해보인다. 벤은 늦었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선다.
벤이 여성과 함께 밖으로 나와 차에 타려고 하는데, 종수가 묻는다. "해미 연락되세요?"
벤은 "그렇죠..나도 걔 연락이 안되요. 해미는..그냥 연기처럼 사라졌어요"
종수가 "해미한테 무슨 이야기 들으신 것 없으세요?" 묻자 ,벤은 "무슨 얘기요?" 종수가 "여행가고 싶다고 했다거나.." 벤은 단정적으로 "나도 잘 모르지만 여행은 안 갔을거예요. 내가 알기로 해미는 지금 돈이 한 푼도 없어요. 가족하고도 연락 안하고 지내고, 친구도 없어요. 해미 보기보다 되게 외로운 여자예요.." 잠시 말을 끊더니 "근데 종수씨 그거 알아요? 해미가 종수씨 특별하게 생각한 거. 나한테 그랬어요. 이 세상에서 자기가 믿는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고. 언제나 자기 편이 되어 줄 사람이라고. 그 말을 듣는데 괜히 질투가 나더라니까요. 지금까지 살면서 질투같은 거 해본 적이 없는데.." 벤은 그 말을 하고는 포르쉐에 올라 떠난다. 종수는 물끄러미 벤의 차를 바라본다.
* 종수는 왜 집 근처 비닐하우스들을 찾아 다닌 것일까..해미가 실종되지 않았다면 종수가 그토록 비닐하우스들을 찾아 다녔을까...? 비닐하우스는 해미에 대한 메타포인지도 모른다. 벤이 그동안 태워 없애버린 연기처럼 사라진 그녀들. 그녀들에 관한 메타포인지 모른다. 벤의 집 화장실 진열대 서랍에 모인 여성의 물건들. 그 물건들은 벤이 사냥 후 먹어치운 그녀들의 흔적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니까 벤은 종수에게 있어 아주 가까운 비닐하우스를 태웠다. 그리고 해미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종수는 비닐하우스를 찾아 내고 싶었다. 벤이 해미가 아닌 비닐하우스를 태운 사실을 통해서 해미가 살아있다는 실존의 증거를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벤은 해미가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태운 것이 비닐하우스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이로써 종수는 더 이상 비닐하우스를 찾아 다니지 않는다. 종수는 더 이상 해미의 실존을 쫓지 않는다. 영화는 이제 종수가 벤을 사냥하는 구도로 전환된다. 종수는 벤의 주위를 맴돌면서 그의 일상을 쫓는다.
* 한편 벤은 종수로 인하여 묘한 삶의 균열을 느낀다. 처음 만난 그날. 벤은 종수가 좋아하는 작가를 물었다. 종수가 좋아하는 작가는 윌리엄 포크너다. 벤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해미의 실종 이후 해미를 찾아다니던 종수가 벤을 만났을 때, 벤은 윌리엄 포크너의 책을 읽고 있었다. 종수가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벤은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종수에게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비밀을 털어놓았다. 곧 태울 것이라는 것까지도. 그는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하여 메타포를 언급하면서 종수를 의식했다. 해미로부터 종수에 대한 마음을 들었던 그는 질투를 느낀다. 그것은 해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종수에 대한 감정이다.
- 감상평 6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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