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등 감상평

이창동 감독의 버닝 후기 감상평 7 (결말 스포) - 장면별정리 + 나름의 해석

조앤디디온 2018. 12. 28. 15:23


[ 장면 23 - 법정, 종수 아버지에 대한 판결 선고 ]

다시 법정. 재판부는 판결문을 낭독함으로써 판결을 선고한다. 종수의 아버지 이용수는 피고인 석에서 일어선 체 재판장의 선고를 듣는다. 그의 입술이 씰룩거린다. 종수는 방청석에서 이를 목격한다.

"...이 사건 범행은 피고인이 행정처분을 내린 공무원을 찾아가서 폭행한 사건으로서 죄질이 좋지 않습니다. 특수공무집행방해, 폭행, 재물손괴 다 유죄로 인정됩니다. 피해자가 엄지손가락이 부러져서 전치 6주의 상해를 입은 것에 대해 고의로 폭행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의자를 휘둘러서 집기가 부서지고 그 과정에서 다친 만큼 상해로 판단하는 데에는 아무런 의문이 없습니다. 피고인이 피해자와 합의하지 않은 점, 피해자가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고 있는 점, 전에도 유사한 사건으로 처벌받은 점 등을 고려하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주문과 같이 형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고인을 징역 1년 6월에 처한다."


[ 장면 24 - 종수의 집. 송아지를 떠나보내는 종수, 아버지를 정리하다. ]

종수의 집. 축사에서 송아지가 끌려나온다. 트럭에 실리는 송아지를 종수가 바라본다. 송아지의 눈. 종수는 송아지를 그저 바라본다.

송아지를 떠나보낸 종수는 달린다. 텅 빈 겨울 들판을 달린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화면 위로 종수의 집 테마곡이 흐른다.





[ 장면 25 - 해미의 집. 해미와의 섹스 그리고 소설 쓰기 ]

해미의 집. 침대 위에서 종수는 해미와 나란히 누워 있다. 종수의 등 뒤에서 해미가 그의 성기를 애무한다. 종수는 절정에 이른다.

섹스가 끝난 후 침대 위에는 종수 혼자다.

잠시 후 종수는 창을 향해 앉아 노트북 자판을 두드린다. 카메라는 해미의 방 창문으로 빠져나와 서울 도심을 향하고 이내 해미의 방 안 종수를 비춘다. 그리고 다시 서울 시내 도심 전체를 비춘다. 석양이 지고 있다. 하늘은 붉게 물들어 간다.


[ 장면 26 - 벤의 집. 또 다른 의식을 집전하는 벤 ]



벤의 집 화장실. 벤은 세면대에서 거울을 보면서 눈에 렌즈를 끼운다. 무정한 표정. 거울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본다. 진열대를 열어 화장품함을 들고 나간다. 벤의 그녀가 거실에 인형처럼 앉아 있다. 벤은 그녀를 마주보고 앉아 그녀의 얼굴에 화장을 시작한다. 벤의 휴대전화기가 울리지만 받지 않는다.


[ 장면 27 - 파주 인근 들판. 종수의 결행 그리고 의식 ]

새벽. 세상은 온통 푸른 빛이다. 벤은 겨울 들판에 차를 세우고 담배를 피운다. 주변엔 잘 정돈된 비닐하우스들이 있다.

얼마 후 멀리서 종수의 트럭이 다가온다. 종수의 트럭이 도착하자 벤이 다가간다. 트럭 운전석 문이 열린다.

벤이 말한다. "종수씨! 여기 비닐하우스 참 많네요" 그리고는 훗 웃는다.

종수가 내린다. 벤이 묻는다. "해미는 어디있어요? 해미하고 같이 보자면서. 해미는 안 왔어요..?"

종수가 운전석 문을 세게 닫는다. 쾅!

그리고 바로 종수는 벤을 칼로 찌른다. 벤의 몸으로 칼이 들어갔다 나오고... 들어갔다 나오는 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벤은 신음한다. 벤이 비틀거리며 포르쉐로 돌아온다. 아마도 차를 타고 도망치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종수가 벤을 따라온다. 벤이 미처 차에도 타기 전에 종수는 벤을 기대어 세운 체 다시 벤의 복부를 칼로 찌른다. 벤은 막아보려 애쓰지만 소용이 없다. 덫에 걸린 한 마리 짐승처럼 벤은 미약하다. 힘이 빠져버린 벤이 종수를 안는다.  화물차가 무심하게 들판 옆 도로를 지나간다.

종수는 벤을 껴안아 들고서 벤을 포르쉐 운전석에 앉힌 후 트럭으로 가서 뒤 화물칸에서 석유통을 들고 온다. 오다가 구토를 한다. 비틀거리며 포르쉐로 다가온 종수는 칼을 주워 벤의 포르쉐 안으로 던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운전석과 포르쉐 이곳저곳에 석유를 뿌린다. 

피 묻은 손. 피 묻은 옷을 벗는다. 라이터를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고 바지를 벗는다. 허벅지에 붉은 피가 묻어 있다. 속옷까지 모두 벗은 종수. 그의 옷들을 모두 포르쉐 안으로 던져 넣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짐승같은 소리를 내며 종수는 트럭으로 돌아간다. 알몸으로 걸어서 트럭에 탄다. 트럭 안은 얼음같이 차다. 하늘과 들판은 온통 푸르다. 푸른 파스텔톤 세상. 종수는 트럭의 시동을 걸어 천천히 포르쉐를 지나간다. 불타는 벤의 포르쉐. 트럭 뒤 창문으로 벤의 승용차가 불타오른다. 언젠가 공항에서 벤을 처음 만난 날 벤을 뒷좌석에 태우고 트럭을 달리던 그때 트럭 뒤 창문으로 붉은 석양이 지고 있었다.


재즈풍 테마곡이 화면으로 계속 흐른다. 화면은 서서히 암전된다.  



* 영화의 마지막. 숨가쁘게 장면이 바뀌면서 인물들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리고 벤과 종수의 마지막 조우. 영화는 또 하나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 들판과 하늘은 인물들과 무관하게 무심한 듯 존재한다. 새벽이 오고 석양이 지고 밤이 된다. 다시 새벽이 오고 석양이 지고 밤이 된다. 파스텔톤의 하늘. 붉은 석양은 모두 몰가치적으로 존재한다. 때로 너무나 아름답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들판과 하늘은 그냥 있다. 존재할 뿐이다. 극적인 존재는 인간뿐이다.








이창동 감독은 한편의 소설을 완성했다. 장면마다 숨은그림의 퍼즐들을 숨겨 놓았다. 어쩌면 버닝은 종수가 쓴 한편의 소설, 즉 메타포로서 허구인지 모른다.

종수와 벤은 양 극단의 위치에 있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종수는 못가진 자, 벤은 가진 자이다. 벤은 종수가 사랑하는 해미를 죽이고 유기했다(살인과 유기의 구체적인 방법이나 장소는 알 수 없다). 오직 재미를 위해서. 종수를 사랑하고 종수가 사랑하는 유일한 존재마저 빼앗았다. 감독은 종수와 벤을 극단적으로 대립시킴으로써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한다.

그런데 한편 인간의 실존과 삶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벤은 리틀헝거의 극단적인 전형이고 종수는 그레잇헝거의 초기 모형이라 할 수 있다. 벤은 그냥 배가 고프다. 주기적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사냥을 한다. 낡고 버려진 비닐하우스들. 그들은 그냥 존재한다. 벤은 그들 중 아무거나 하나를 태울 수 있다. 거기에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종수는 인생이 수수께끼 같다. 그에게 세상은 의미들로 가득하다. 분단된 국가를 매일매일 직시하는 곳에서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한 아버지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그런 종수에게 어린 시절의 그를 소중하게 기억하는 해미가 나타난다. 해미는 실존에 대한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는 사라진다. 해미를 통해 알게 된 벤은 종수의 표현대로라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데 돈은 많은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다. 영화의 마지막. 종수는 해미의 실종에 대한 의문에 답을 얻는다. 아버지에 대하여 실형의 판결이 선고되자 송아지를 처분한다. 그리고 벤을 겨울 들판으로 불러낸다. 아버지의 칼로 벤을 죽인다. 벤의 라이터로 그를 태운다. 버닝.

종수의 의식은 벤의 그것과 다르다.

벤의 의식은 배고픔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배고픔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채워질 수 없고 결국 존재를 허무하게 할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벤은 사람들과 있음에도 하품을 한다. 그에게 삶은 그저 배고픔이다.

반면 종수는 아버지의 세계와 단절하고 벤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었다. 그리고 스스로 벤을 단죄했다. 벌거벗은 체 트럭으로 향하는 그를 두고 아프리카 사막의 그레잇헝거의 춤을 떠올린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감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난 아직 그 소설을 읽지 못했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에도 모티브가 되었을 법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어느 블로거가 이에 대한 글을 잘 정리해서 인상깊게 읽은 바 있다. 언젠가 시간을 내어 모티브가 된 소설을 읽고 버닝을 다시 이해할 수 있으면 싶다.


개인적으로, 버닝의 대립적 구도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그러면서 번민한다. 사람들은 리틀헝거로 살면서도 나름 삶의 의미도 갈구하기에 이분법적으로 양분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다만 끊임없는 욕망, 배고픔을 채우기만 하고 삶의 의미를 도외시한다면 결국 세상은 어느 한 편이 또 다른 어느 한 편을 단죄할 수밖에 없다.

비록 자연은 몰가치적으로 존재하겠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다. 끊임없이 번뇌하면서 고민하는 인간. 여기 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말고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돼.. 해미의 말을 떠올린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영화를 3번 보았고. 나름의 해석을 정리하면서 다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떠올린다. 난쏘공에서 영호의 선택은 이유와 명분이 있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구조적인 모순이 존재한다. 그 이유와 명분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영호가 종수가 되어서 세대를 거쳐 세대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버닝은 난쏘공의 이야기를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로 치환한 작품으로서 그 의미를 정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