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등 감상평

영화 주홍글씨(한석규.이은주.성현아.엄지원 주연) 후기(스포 있음)

조앤디디온 2019. 1. 10. 13:13



2004. 10. 변혁 감독.


개인적으로 배우 이은주를 무척 좋아했다. 그녀는 어떤 영화에서도 그녀만의 아우라를 잃지 않으면서 각각의 캐릭터를 연기하였는데, 그것이 어색하면서도 자연스러워서 묘한 매력을 느끼게 했다. 짧은 생애.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였지만 그녀는 작품 하나하나에 그녀 자신 오직 '이은주'라는 배우만이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마치 조각품처럼 새겨놓았다. 2005년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후 한동안 이 영화가 그녀의 죽음에 어떤 동기가 된 것은 아니냐며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13년이 훌쩍 지나서야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나로서는 영화와 그녀의 자살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찾기에는 배우의 삶에 충실했던 그녀에게 선뜻 내키지 않는 분석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영화 주홍글씨는 한마디로 '치정극'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치정극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니, 남녀 간의 사랑 얽힌 온갖 어지러운 정과 관련된 사건 소재 영화 연극이라고 한다. 주홍글씨는 기훈(한석규)을 중심으로 기훈의 아내 수현(엄지원)과 기훈의 연인 가희(이은주) 그리고 살인용의자 경희(성현아) 세 명의 여성이 얽힌 치정극이다. 치정극인 만큼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은 성적 에너지에 지배된다.


영화는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세기 3장 6절 성경말씀으로 시작된다. 인적이 없는 호수 주변 한 대의 차량이 서 있다. 이어지는 기훈의 독백. '모든 유혹은 재미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항상 장난 같이 시작한다. 왜 피하겠는가?' 그리고 세 발의 총성. 이러한 영화의 도입부는 영화의 마지막까지 극의 흥미와 긴장감을 유지하는 장치가 된다.


기훈은 부족한 것이 없다.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형사가 되어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가 누리는 경제적 부의 출처를 알 수 없지만 부유하다. 기훈이 경찰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총이 너무 멋져서 가지고 싶어서였다. 경찰이 되고보니 자신이 그렇게 탐내던 총이 미국에서는 아무 데서나 살 수 있는 물건이었다면서 푸념한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의 도입부 세 발의 총성이 있었던 이유가 드러나는 후반부. 그의 총은 더할 나위 없이 초라한 쓰임새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기훈은 첼로를 전공한 단아하고 아름다운 아내 수현과 모든 것이 정돈된 집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린다. 원할 때면 언제든지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연인 가희가 있다. 가희는 재즈가수로서 자유분방하여 아내와는 전혀 다른 만족감을 준다. 가희는 기꺼이 그의 욕망의 분출구가 되어 주면서도 그를 욕망한다. 기훈과 가희는 서로를 욕망하기에 그들의 섹스는 격정적이다. 기훈은 수현과 가희 사이에서 필요에 따라 줄타기를 하듯 자신의 욕망을 채운다. 수현과 가희는 대학에서 클래식을 전공하면서 절친했던 친구였는데 수현과 기훈의 결혼으로 서로를 외면한지 오래되었다.



                                       


살인사건. 사진관을 운영하던 한 남성이 살해된다. 살인현장의 최초 목격자는 그의 아내. 그녀는 시장에서 사온 콩나물을 던져버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현장을 빠져나온다. 둔기에 머리가 깨져 피투성이가 된 채 사진관 바닥에 쓰러져있는 남편.살인현장에 널부러진 검정비닐봉지 그리고 그 안의 콩나물. 그로테스크하다. 남편의 사망원인은 심장마비. 뇌손상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호흡을 의도했지만 강한 뇌손상으로 심정지가 와서 사망한 것이다. 그녀가 범인일까.

사망자의 아내 경희는 그렇게 기훈과 대면한다. 기훈은 그녀를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하고 사건을 수사하는데, 그녀의 정체가 혼란스럽다. 그녀는 남편에게 순전한 아내였을까. 그녀의 표정이나 몸짓은 이상하게 기훈을 자극한다. 기훈의 욕망을 건드린다. 경희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말한다. 같이 사는 사람이 끔찍한 적이 없느냐고 묻는다. 사진관에 앉아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다 문득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고는 했다고 털어놓는다. 묘한 아우라의 그녀는 수사과정에서 기훈의 외도(가희와의 관계)를 눈치챈다.

한편, 그녀는 남편과 사이에 임신한 아이를 여러 차례 중절하였다는 소문이 있고 절도전과 - 구두를 신고 매장에서 그냥 도망친 -가 있는 데다가  사망한 남편은 얼마전 사망보험금 6억 원의 보험을 가입했다. 그녀는 은밀하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성(그는 후에 남편을 살해한 범인으로 체포된다)에게 거액의 현금을 건네고, 그 모습이 포착된다. 그녀가 남편과 운영했던 사진관에서 그녀의 일상 모습과 신체부위를 촬영한 사진이 나오는데, 이를 촬영한 남성은 어느 대학교수로서 그녀와의 관계가 의문이다. 그녀는 그 남성이 일방적으로 자신을 촬영한 것이라 하고 그 남성은 그녀가 먼저 유혹하였고 심지어 남편이 없는 틈을 타 누드사진까지 찍어달라고 도발했다고 강변한다. 의도된 살인이었을까. 누가 범인일까.. 결국 남편이 아내 몰래 성매매를 하였다가 폭력전과로 출소한 지 얼마되지 않은 동거남(돈을 받은 그 남성)으로부터 협박을 당했고 서로 실랑이 중에 우발적으로 그 남성이 사진관에 있던 성모상으로 머리를 찍어 살해된 사실이 드러나고 범인은 체포된다. 수사는 종결되었고 기훈은 포상을 받는다. 다만 사망시각은 의문으로 남았다.







한편 수현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기훈은 가희와 관계를 정리하려 하고 그러자 가희는 기훈에게 더욱 집착한다. 가희 역시 기훈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기훈의 갈등과 고민이 깊어간다. 수현의 연주회에 찾아온 가희는 두 사람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좇는 수현에게 보란 듯 수현이 보는 앞에서 기훈을 도발한다. 기훈은 수현이 여러 차례 중절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수현에게 의문을 품게 되고 수현은 가희를 찾아와 기훈과의 관계를 알고 있다고 밝히면서 세 사람의 관계는 금방이라도 깨질듯한 유리판처럼 아슬아슬해진다. 기훈은 가희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녀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관계를 지속한다. 이를 눈치 챈 수현은 기훈과의 결혼에 대하여 고민한다.


기훈이 포상을 받는 날. 가희는 기훈이 선물로 사준 드레스를 입고 찾아온다. 밀회를 즐기기 위해 은밀한 장소를 찾던 두 사람은 인적이 없는 호수가에 차를 세운다. 가희의 생일임을 몰랐던 기훈은 차 트렁크를 열어 수현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선물(도자기 인형)을 가희에게 주고, 기뻐하는 가희는 기훈을 끌어안고 트렁크 안으로 쓰러진다. 순간. 트렁크의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은 그 안에 갇힌다. 장난처럼 시작된 일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그렇게 며칠 동안 두 사람은 트렁크 안에서 울다가 웃다가 결국 감정이 격해져 서로를 증오한다. 가희는 기훈에게 여러 차례 아내인 수현에 대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었는데, 이제 그 비밀을 털어놓는다. 수현이 가희를 사랑했음을. 수현을 도발한 것은 가희였지만(두 사람은 연습실 - 수현은 첼로를 연주하고 가희는 피아노를 연주한다 - 에서 에로틱한 감정에 사로잡혀 사랑에 빠진다. 이후 수현은 가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가희를 사랑한 것은 수현이었다. 가희가 기훈과 사랑에 빠지자 수현은 기훈에게 접근하여 그와 결혼함으로써 가희가 자신을 떠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희가 사랑한 것은 결국 기훈이었다.

영화의 도입부 세발의 총성은 트렁크 안에 갇힌 기훈이 숨을 쉬기 위한 방편으로 총을 쏜 것이었다. 물론 총을 쏴서 트렁크 문을 열어보려 하였지만 총은 어디에도 소용이 없었다. 좁은 공간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이 며칠을 보내고 구출될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가희가 유산의 징후로 하혈을 하고 충격을 받은 가희의 정신은 무너진다. 기훈이 말리지만 결국 기훈의 총으로 머리를 쏴서 자살한다.


기훈의 실종으로 인하여 경찰의 수색이 시작되고 며칠 후 기훈의 차량을 발견한다. 트렁크를 열자 피투성이가 된 시신과 함께 그 역시 피투성이가 된 기훈이 쓰러져있다. 기훈은 구조되었으나 미친 듯이 호수로 뛰어들고 동료 경찰들이 그를 구출한다. 현장까지 찾아와 이 모든 상황을 수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피투성이가 된 기훈은 영화의 처음 시작 피투성이가 된 경희를 연상하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경찰을 그만 둔 기훈이 살인사건의 유력했던 용의자 경희를 찾아온다. 경희는 그 사이 사진관과 집을 내놓고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한다. 기훈은 남편의 사망원인과 그 시각에 비추어 그녀가 남편을 살해한 범인이었음을 알고 있다. 경희가 시장에서 사진관으로 돌아왔을 당시 남편은 아직 살아있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남편. 경희는 성모상을 들어 여러 차례 남편의 머리를 가격하여 살해했던 것이다.


영화는 경희의 욕망의 끝과 기훈의 욕망의 끝을 그들 모두가 피투성이가 된 형상으로 마무리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선악과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 인간의 욕망은 그렇게 달콤하게 시작한다. 그러나 그 끝 파국이 불러오는 것은 결국 연약한 몸뚱아리에 피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욕망에 대한 심판. 성경적 상징으로 잘 짜낸 치정극. 한국영화 주홍글씨는 잘 만든 치정극이다.

배우들의 명품 연기가 없었다면 이 영화의 멋진 미장센이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은주가  재즈가수로서 영화의 중간중간 재즈가 연주되는데 영화 전체를 통틀어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는다. 이은주는 직접 재즈곡을 부르기도 하는데 그녀의 매력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