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 10 - 다시 파주 집 ]
종수가 파주 집에 도착한 밤.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 종수는 다급히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전화를 건 상대방은 역시 말이 없다.
"말을 하세요.. 전화했으면 말을 해야죠.. 누군데 전화해서 말이 없는거예요...예?"
창으로 해가 비친다. 종수는 아버지가 자신을 목마 태운 사진을 향해 공을 던진다. 그리고는 컴퓨터 앞에 앉아 아버지를 위해 탄원서를 작성한다. '피고인 이용석씨는...순박하고 정다운 이웃이었고...'
마을의 어느 집으로 들어선 종수, "계세요?" 안에 사람이 있는지 묻는다. 외국인여성과 그녀의 자녀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빼꼼히 밖을 내다본다. 외국인여성은 계속 묻는다. "무슨...일이에요..?" 종수는 쑥스럽다는 듯 "아저씨 안계세요..?" "없어요...무슨...일이에요?" "탄원서에 싸인받으려고..." "없어요" "예...다음에 올께요..."
종수는 비닐하우스에서 일하고 있는 이장을 만나 탄원서에 싸인을 부탁한다. 이장은 사실 종수의 아버지를 잘 모른다고 사람들과 내왕도 없었고 무슨 일이든 혼자했다고 하면서 탄원서에 씌어진 순박하고 정다운 이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종수는 어떠한 불이익도 없을 거라며 이장을 설득한다. 이장은 종수에게 글을 잘 쓴다고 하고는 탄원서에 싸인을 해준다.
종수는 이장에게 집에 송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살 사람이 있겠는지 묻고 이장은 암놈이냐고 묻고는 알아보겠다고 한다.
[ 장면 11 - 낮. 서울 카페 ]
한낮. 종수는 전철을 타고 있다. 전철 창문 밖으로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이 이어진다.
서울 반포 주택가 도로, 도롯가에 있는 카페. 종수는 창가에 비친 자기 모습을 매만지고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재즈풍 음악이 흐르고 있다.
해미가 기다리고 있다. 종수는 반가운 얼굴로 활짝 웃는다. "누가 또 있어?" 해미가 있는 곳 테이블로 다가가 해미에게 묻는다. 해미는 팔을 뻗어 손으로 창을 가리킨다. 카페 밖에서 벤이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종수의 표정이 바뀐다. 실망스러운 표정. 벤이 들어와 종수에게 반갑다고 인사하고는 해미 옆으로 나란히 앉는다. 자연스럽다. "해미가 종수씨 보고싶다고 해서.." "오빠가 먼저 부르자고 해서.."
벤은 종수에게 찾는 데 힘들지 않았는지 묻고 해미는 여기가 벤이 사는 동네라고 말한다. 종수는 휴대폰을 보고 잘 찾아왔다고 하면서 동네가 예쁘다고 한다. 벤은 조용한 곳이라고 한다. 해미는 벤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계속해서 봐달라고 한다. "오빠가 나 손금 봐주고 있었어" 벤은 해미의 손바닥을 바라보면서 "해미한테는 다른 사람과 다른 뭔가가 있어. 음...마음에 뭔가가 있어..마음에 돌이 있어. 그 돌이 해미를 힘들게 하고 있어. 그것 때문에 뭘 해도 100% 즐겁지 않은 거야. 그것 때문에 맛있는 걸 먹어도 맛있지 않고 마음에 드는 남잘 만나도 좋다는 소리 못하고..." 해미는 묻는다. "그럼 어떻게 하면 돼요?" "빼내야지. 내가 빼내줄까?" "오빠가 빼낼 수 있어요?" "날 믿으면 돼. 손을 잡아봐..눈을 감고" 해미는 벤에게 손을 맡긴 체 눈을 감는다. 벤은 해미의 손을 감싸듯이 쥔 뒤 검은색 돌을 놓고는, "이제 손을 펴봐" 해미는 우습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게 뭐야아"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는다. "뭐긴, 이거 돌이잖아. 내가 니 마음에서 빼냈잖아" "이 돌 어디서 난거야, 이 돌 어디서 난거야?" "아까 저기 화단에서 주워왔지" "이거 하려고? 저기서 일부러 주워온거야?" "응"
해미는 묻는다. "왜?" 벤이 답한다. "재밌잖아. 재미만 있으면 난 뭐든지 해"
종수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벤은 사냥꾼처럼 먹잇감을 앞에 놓고 있다. 해미는 덫으로 점점 빠져든다. 사냥꾼은 말한다. 재밌잖아. 재미만 있으면 난 뭐든지 해. 그는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재미를 위해서 사냥을 한다. 해미는 모른다. 그것이 사냥이라는 것을.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한 웃음을 웃는다. 종수는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냥의 과정에 일부가 되어 있다.
벤은 이제야 얼굴을 돌려 종수를 본다. "종수씨 파스타 좋아하세요?" 해미 역시 이제야 종수에게 제대로 된 시선을 준다. "오빠가 집에서 파스타 요리 해준데"
[장면 12 - 저녁. 벤의 집 ]
벤을 따라서 해미가, 해미를 따라서 종수가 걷는다. 벤의 집으로. 집 안. 공간 전체에 재즈풍 음악이 계속 흐른다. 쿵. 쿵. 박자가 울린다. 종수는 벤의 집 거실을 둘러본다. 깔끔하게 정돈된 장식품들. 해미는 벤과 함께 주방에 있다. "우아 솜씨가 장난이 아니네. 난 요리 잘하는 사람이 부럽더라" 해미는 기분이 들떠서 종수를 바라보며 말한다. "종수야, 너 요리 잘해?" 종수가 "난..뭐 자취했었으니까...근데 할 줄 아는 게 몇 개 없어" 라고 말하자, 이어서 벤이 말한다.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 건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걸 내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어서야. 그리고 더 좋은 것은 내가 그걸 먹어버린다는 거지. 인간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듯이. 난 나 자신을 위해서 제물을 만들고 내가 그걸 먹는거야"
종수는 벤을 바라보고 있다. 해미는 순진하게 묻는다. "제물?" 벤이 답한다. "제물은 말하자면 그냥..메타포야" 해미는 또 "메타포는 또 뭐야?" 벤은 "메타포에 대해선...종수씨에게 물어봐" 벤의 얼굴에 장난기어린 웃음이 지나간다.
* 종수는 자취를 하면서 배가 고파서 몇 개의 요리를 해서 먹는다. 종수에게 요리가 재미있을 수 없다. 반면, 벤은 재미로 사냥을 하고 그걸 먹는다. 자신을 위해서 제물을 만들고 그걸 먹는다. 그러니까 자신을 위해서. 사냥을 하고. 그걸 먹는다. 그리고 그 과정 전체를 즐긴다. 그래서 재미있다. 벤은 해미를 먹을 생각이다. 천천히 계획한 대로. 마치 요리를 하듯이. 자신을 위한 제사의식을 준비한다. 제물이 준비되면 의식을 치르고 그것을 먹을 것이다. 해미는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한다. 종수 역시 알지 못한다. 종수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지 어딘가 불편하다.
벤의 집 화장실.
화장실로 가는 복도에는 아프리카풍의 장신구들이 진열되어 있다. 마치 제사를 드리는 신전처럼 분위기가 묘하다. 종수는 비틀거리듯 걸어서 화장실로 들어간다.
종수는 손을 씻고 진열대를 열어 본다. 수건, 화장지...모든 비품들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잇다. 그런데 의아한 물건이 있다. 바로 화장함. 남성인 벤이 화장함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종수는 화장함을 열었다. 가지런한 여러 색의 립스틱. 펜슬.. 화장함을 닫고는 진열대 서랍을 열어 본다. 그 안에는 여성들이 사용했을 만한 여러 종류의 물건들이 있다. 머리끈, 팔찌, 지갑...
식사를 마치고 벤은 주방에서 식탁을 정리하면서 접시들을 치우고, 종수와 해미는 거실 옆 바깥 베란다에서 함께 담배를 피운다. 베란다 너머로 인근의 주택들이 보인다. 종수가 해미에게 묻는다.
"저 사람 나보다 몇 살 많아..?" "여섯살? 일곱살?" "어떻게 하면 저런 나이에 저렇게 살 수 있지? 여유있게 여행다니고 포르쉐 몰고.. 파스타 삶고..." "젊은 나이라도 돈이 많은가보지.." "위대한 개츠비네" "무슨 말이야?" "뭐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돈은 많은.. 수수께끼의 젊은 사람들..한국에는 개츠비들이 너무 많아...저 사람이 너 왜 만나는 거 같애? 그거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어?" "..오빠가 나 같은 사람 좋아한데.. 흥미있데"
* 뭐하는지 모르겠는데 돈은 많은 수수께의 젊은 사람..종수가 벤에 대하여 내린 정의다. 종수는 이미 계급적 자의식으로 벤을 바라본다. 벤이 해미를 만나는 이유에 대한 해미의 답변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다. 벤이 자기같은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니까. 흥미있다고 하니까. 벤은 그냥 굶주린 자로서 사냥을 한다. 해미는 그냥 먹잇감이다. 그런데 해미는 아무것도 모른다. 종수는 불편하고 불쾌하다. 벤의 집 화장실의 화장함과 진열대 서랍 안의 물건들. 벤은 도대체 왜 그 물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 장면 13 - 밤. 서울 번화가 어느 bar ]
밤. 택시에서 세사람이 내린다. 벤이 해미와 종수를 데리고 어느 바 앞으로 간다. 그곳에는 벤의 지인들이 있다. 벤은 그들에게 종수를 작가라고 소개한다. "여긴 나의 새로운 친구. 이종수씨. 소설을 쓰셔.." 지인 한 명이 "아, 작가세요?" 라고 묻자 종수는 그들에게 아직 등단은 못했고 습작하고 있다고 말한다. 벤이 거든다. "작가는 쓰면 작가야..writer 쓰는 사람"
벤과 해미, 일행 중 일부가 먼저 들어가고, 종수는 남은 일행과 바깥에서 담배를 피운다. 그들은 웃으면서 편하게 그들만의 얘기를 나눈다. "프로방스...푸하하하..."
bar 안. 탁자 위 비어 있는 와인병과 와인잔, 접시들은 그들의 식사가 끝났음을 알려준다. 해미는 말한다.
"부시맨들은 밤에 모닥불을 이렇게 피워놓고 둥그렇게 서서 춤을 춰요. 아주 옛날부터 그렇게 춤을 춰 왔데요. 그중에서 가장 나이들고 가장 지혜로운 할머니가 북을 막 치거든요. 그러면 그 리듬에 맞춰서 춤을 춰요..." 해미는 정말로 두팔을 앞으로 뻗어서 춤을 추듯이 흔든다. "처음에는 두 팔을 땅으로 향하고 이렇게...이건 리틀 헝거의 춤이예요. 배가 고픈 사람의 춤.." 종수는 해미를 바라본다. 그의 표정이 어색하다. 해미는 계속해서 도취되어 말한다. "춤을 추다보면 점점 두 팔이 위로 올라가면서 하늘을 향해요..하..이게 그레잇 헝거의 춤이예요.." 해미는 두팔을 위로 올려서 계속 흔든다. "삶의 의미를 구하는 춤...초저녁에 시작해서 한밤중이 될 때까지 이 춤을 계속해서 추면서 이 리틀 헝거가 점점 그레잇 헝거가 되어가는 거예요. 이건 진짜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직접 봐야지.."
사람들은 해미를 보고 있지만 그녀의 얘기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다. 비웃음이랄까. 깔보는 듯한 웃음이 그들의 얼굴 위로 스친다.
놀리듯 일행 중 누군가 말한다. "그럼 직접 한 번 보여주세요" "정말요?" "네" "해봐요. 재미있을 것 같은데.."
종수는 해미를, 그리고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벤을 본다. 벤은 해미를 보면서 흐믓한 미소를 짓고 있다.
"좋아요. 그럼 한 번 해볼께요. 그런데 리듬이 있어야 해요. 다같이 손뼉을 쳐주세요. 이렇게..딴! 딴! 딴! 따단! 따단!..." 다같이 손뼉을 친다. 해미는 춤을 춘다. 춤을 추는 해미의 동작은 이질적이다. 종수의 얼굴. 종수는 불편하다. 해미는 몰입해서 춤을 춘다. "딴딴딴 따단따단...점점 그레잇 헝거가 되어 가는 거예요." 사람들의 얼굴에 냉소가 스친다. 억지로 웃음을 참는 이도 있다.
종수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다시 벤의 얼굴을 본다. 벤은 하품을 하다가 종수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다.
* 벤과 지인들의 모임. 그들 역시 벤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로 보인다. 그들에게 종수나 해미는 이질적이다. 아프리카의 춤에 관한 얘기를 하는 해미는 너무나 이질적이다. 그래서 웃음을 참아야 할 정도다. 정작 해미는 그것을 모르지만 종수는 그들과 다름을 너무나 명료하게 자각한다. 해미에게 춤을 권하면서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하고 춤을 추는 해미를 보면서 비웃는다. 그들에게 리틀 헝거와 그레잇 헝거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냥 아프리카의 춤일 뿐이다. 그냥 그 상황이 재미있거나 재미가 없을 뿐이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벤은 하품을 하고 있다. 지루한 듯이. 자신과 이 모든 상황이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이.
깊은 밤. 그들은 클럽에 모여 춤을 춘다. 클럽 안 댄스음악이 쿵쾅대고 사람들로 가득하다. 해미는 그들 안에서 도취되어 춤을 춘다. 계속 춘다. 종수는 춤추는 사람들을 헤집어 클럽을 빠져나온다.
해미를 남겨놓은 체.
- 감상평 4 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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