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왜 우리는 대법원장을 선거로 뽑지 않는가?
o 민주주의는 다수가 통치하는 체제다. 민주적 정당성은 다수의 동의에서 나온다. 그런데 사법부는 그 특수한 성격 때문에, 다수 지배의 원리로부터 방파제를 쳐준다. 민주주의는 기본권, 특히 소수자의 기본권 보호 없이 돌아가지 않아서다.
다수의 뜻으로 기본권도 제약할 수 있다고 해보자. 법 앞의 평등, 양심과 표현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제약받는 소수파는 이 게임에 참가할 이유가 사라진다. 게임의 규칙에 불복하는 구성원이 늘어나면 민주주의 자체가 위협받는다. 그러니 민주주의는 다수의 뜻으로도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 보호 장치가 있어야 돌아간다. 그게 사법부다. 사법부는 민주주의 원리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기관이다.
o 이 명쾌한 결론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만들어낸다. 모든 권력은 견제받아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고전적인 정치 이론가들은 인간의 선의와 헌신을 믿지 않고, 견제와 균형으로 야심을 억눌러야 한다고 믿었다.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는 권력은 반드시 남용된다. 권력에 책임을 묻는 가장 간명한 방법은 주기적인 선거다.
사법부도 권력이므로 책임을 물을 경로가 필요하다. 그리고 사법부는 다수 지배의 원리로부터 보호받을 필요가 있으므로 선거는 좀 곤란하다. 사법부는 책임성의 가장 좋은 수단인 선거를 봉쇄한 채로 책임성을 강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사법부 특유의 딜레마다. 양승태 대법원이든 김명수 대법원이든 가리지 않는, 민주주의 원리에 내재한 본질이다.
o 법관에 책임성을 묻는 방법으로 한국사회가 시도한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최고 권력인 청와대가 사법부를 실제로 장악했다. ... 이런 방식의 '책임성'을 지금 되살릴 수는 없다. 이것은 민주주의 원리가 요구하는 책임성과는 정반대다.
민주화 이후 군사정권식 직접 통제는 줄어들었다. 하지만 판사들의 권력을 견제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근본 과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입법부나 행정부여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결국 사법부 스스로 법관을 견제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 역할을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자청했다.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법관 통제 체제다.
o 33번 문건은 양승태 대법원이 법관 독립성과 책임성의 딜레마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33번 문건은 우선 본질적 딜레마를 정확히 인식한다. "주권자로부터 선출되지 아니하여 민주적 정당성을 갖지 못하고, 판결에 대하여 불가침의 독립성을 헌법으로 보장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여기까지는 정확한 문제의식이다.
그런데 답변이 놀랍다. "사법부 존립의 근거이자 기반은 국민의 신뢰"라고 쓴다. 민주적 정당성도 없고 책임성 고리도 약한 법관에게 독립성이 주어진 이유는, 국민이 믿어주기 때문이라는 의미다. 책임성의 원리는 권력자에 대한 믿음에 기대서는 안 된다. 33번 문건은 시작부터 이 정치이론의 대전제로부터 이탈했다.
이후 전개되는 대목은 길게 인용할 가치가 있다. "국민의 신뢰를 위한 법관의 책무는 기본적 품위와 공정한 외관이다. 국민은 모두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법관을 희망한다. 재판 업무는 물론 사회적 이슈, 개인생활 등에 대한 법관들의 '민낯'이 국민에게 드러나는 경우는 물론, 법관들 사이에 '해방구(맥락상 익명 카페를 지칭)'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알려지는 경우에도 사법부에 대한 실망과 냉소, 불신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법관의 표현의 자유는 법관의 책무를 위해 제한될 수밖에 없다. ... " ... 겉으로 이견이 노출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국민이 믿을 것이다.
하나 더 있다. '이견'을 제한하려면 '바른 의견'이 먼저 있어야 한다. 양승태 대법원이 의도한 바른 의견이란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의 의견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문장은 2번 문건 '인사모 대응 방안'에 있다(인사모는 양승태 대법원이 사찰한 판사 연구 소모임이다.) ... "대법원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견을 법원 내외부에 표출할 가능성 높음." 건조한 사실 기술이 아니다. 대법원 정책에 반대하는 의견 표출을 '문제점'이라고 규정한다. 이 대목에 이르면 양승태 대법원이 '판사동일체 원칙'을 제시했다고 봐도 될 정도다.
o 양승태 대법원은 이런 논리가 무너지는 경로를 그야말로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대법원장의 장악력이 높아지자, 대통령은 사법부 장악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3000명 판사를 장악하는 것보다 대법원장 한 명 장악이 훨씬 쉽다. 대통령이 사법부 장악에 관심을 보인 상황에서, 대법원장은 대통령의 관심을 이용해 로비를 시도했다. 거기 걸린 판돈이 바로 재판이었다. 양승태 대법원의 판사동일체식 책임성 체제는 이렇게 파산했다.
지금 김명수 대법원이 서 있는 땅이 바로 이 폐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요구받는 사법 개혁의 본질은, 독립성·책임성 딜레마에 대해 박정희 군사정권이나 양승태 대법원보다 더 나은 답을 내놓는 것이다.
o 대법원장의 권한을 내려놓고 법관 독립성을 강화하는 것은 이 폐허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안이다. 하지만 그것도 해법이 되기 어렵다. 책임성을 물을 고리가 없는 상태로 독립성만 강화한다면, 그때는 판사 개인에 대한 로비에 사법부가 취약해진다. 특히 사회적 강자들, 이를테면 재벌의 사법부 로비를 제어하기 어려워진다. 판사들이 조직 보위 논리를 스스로의 판단과 열정으로 추구할 위험도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책임성 고리가 약한 채로 독립성만 챙겼던 검찰이 간 경로다.
o 권력 이론은 어떤 권력자의 선의도 믿지 않는다. 오직 견제와 균형을 통해 책임을 강제받는 권력만 믿는다. 정치학자들은 그래서 사법부 내에 '이견의 노출'이 활발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판사동일체식 접근'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사법부 구성원들의 공개 논쟁은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대법원이 보여준 '협조(80번)'와 '조율(82번)'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든다. '떠드는 입'을 많이 만들수록 협조와 조율의 위험부담은 커진다. 권력을 길들이는 방식은 선한 사람을 선출하는 게 아니라, 야심 있는 사람도 함부로 할 수 없도록 보는 눈과 떠드는 입과 개입하는 손을 만드는 것이다.
o 역대 대법원은 대체로 이견 표출을 금기시했다. 특히 재판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는 우려가 컸다. 이제는 법원 내에서 '떠드는 입'이 늘어야만 독립성과 책임성의 딜레마를 풀수 있다는 반론이 유력해졌다. 법원 내 연구회를 활성화하고, 연구회들이 법원 밖 공론장에서 치열하게 토론하도록 권장하자는 제안도 그래서 나온다. 이런 상호 체제가 책임성뿐만 아니라 독립성도 더 잘 보장한다고 이론가들은 본다. 판사의 독립성이란 제멋대로 재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법관 양심에 따른 판단을 내리는 데 권력자의 개입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판사가 모든 이견과 보는 눈으로부터 외따로 떨어져 있을 때가 아니라 상호 견제로 얽혀 있을 때 달성 가능하다. 그것은 양승태 대법원의 관료적·수직적 개입과는 다른 개방적·수평적 개입일 필요가 있다.
o 그래서 김명수 대법원이 받은 핵심 과제는 법관에게 독립성과 책임성을 동시에 쥐여줄 '개방적·수평적 개입'을 설계하는 것이다. ... 이것은 민주주의 원리와 사법부 원리에 내재한 근본 긴장을 다루는 문제다. 공론장이 딜레마의 구조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출발이 될 수 있다.
* 2018. 7. 3.자 시사in 563호 중에서
'함께 생각해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월호 6주기 (0) | 2020.04.29 |
---|---|
아스팔트 위의 개신교 - 전광훈 목사의 목회 현상에 관하여 (0) | 2020.01.15 |
청년 김용균의 죽음 (0) | 2019.01.14 |
청년 김용균의 죽음은 계속되고 있었다. (0) | 2019.01.14 |
딸을 키우는 경험이 미국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0) | 2018.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