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보일러 온도 올리고 따뜻하게 주무세요."
삐그덕 캉!
엄마 집 대문을 닫으며 영순은 엄마에게 소리쳤다.
영순의 친정 엄마는 3년 전 대장암 수술을 하고 항암을 하셨다.
다행히 엄마는 잘 버티고 있다.
매주 3회 정기적으로 엄마를 챙겨드리고 있는 영순은
엄마 집을 나올 때마다 대문을 닫으며 엄마에게 무슨 말이든 한 마디씩 하는 버릇이 생겼다.
마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듯이.
엄마의 간병을 위해 엄마의 집을 영순의 집 가까이로 옮겼다.
영순은 500m 걸어서 5분 거리의 엄마 집을 정기적으로 왕래한다.
엄마 집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면서
영순은 휴대폰을 꺼낸다.
낮에 온 이모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모는 엄마와 싸운 후 영순에게 전화해서 무심한 듯 안부를 챙긴다.
영순에게 엄마와 엄마의 형제들은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이번에도 안부전화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영순은
가벼운 마음으로 이모에게 전화했다.
서울 이모
엄마 바로 아래 여동생이다.
이모는 서울에 산다. 강남구 압구정동
영순이 기억하는 이모는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이모는 돈을 좋아한다.
돈을 벌고 돈이 모이고 쌓인다. 이모가 사는 이유다.
이모가 서울을, 서울 중에서도 강남구 압구정동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역시 돈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땅값을 자랑하는 그곳. 이모는 그곳을 떠날 수 없다.
이모부와는 이혼을 했다.
개인택시를 했던 이모부는 화투도박에 빠져 번 돈을 자꾸만 탕진했다.
결국 이모와는 이혼했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모는 이모부를 사랑했다.
그러나 이모부보다 돈을 선택했다.
보광동 땅 부잣집 외동아들이었던 이모부는 젊은 시절 잘생긴 부잣집 아들이었다.
이모는 보광동에서 연예인 뺨치는 미모의 마담이었다.
엄마로부터 들은 얘기라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인지 잘 모른다.
그렇게 나름 보광동 유명인들의 만남은 결혼으로 이어졌고
슬하에 딸을 두었다. 지영. 영순의 사촌동생이다.
이모는 돈을 애써 모았지만 원하는 만큼 부자가 되지는 못했다.
압구정동이 천지개벽하였지만 이모는 천지개벽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악착 같이 돈을 모았다.
70대가 되어 딸 지영의 이름으로 압구정동에 오피스텔 3채를 소유하고 있다.
늦게 뛰어든 중고품 거래시장에서 이모는 나름 성실하게 자기 기반을 쌓았다.
그런데
그런 이모가 영순에게 1억 원을 빌려 달라고 한다.
어린 시절 가난한 가족들에게 그나마 도움을 많이 준 사람이 이모였다.
엄마가 원하는 만큼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도움을 준 뒤에는 항상 채권자의 갑질 비슷한 언동이 뒤따랐다.
그렇지만 이모 덕분에 가난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에서 종종 구제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영순이 특별히 이모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이유는 방학 때면 이모 덕분에 서울 구경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변덕스러운 지영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비굴함을 견디어야 했지만 서울 구경은 어린 영순에게 흥미로운 일이었다. 63빌딩, 한강대교, 여의도, 한강수영장... 어린 시절 추억 속에 서울이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모 덕분이었다.
그래서 영순은 이모에게 어느 정도의 부채의식이 있었고
자리를 잡은 후에는 이모가 내려오실 때마다 용돈도 드리고 식사도 대접하면서 빚을 갚고자 했다.
몇 년 전 엄마에게 드린 명품가방을 이모가 가져갔을 때 영순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빚을 갚은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런 이모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한다.
이모는 영순에게 지영의 명의 오피스텔 등기부등본을 보내주었다. 확인했는데 대출이 하나도 없었다.
이모는 대출을 받으려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다.
전화로 이모는 영순에게 엄마로부터 들었다고 하면서
김서방(남편)이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준다고 하던데 자기한테도 빌려 달라는 것이다.
이런... 역시 엄마...
이유를 모르겠다.
엄마가 약을 올렸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얼마 전 이모와 크게 싸우셨다고 했다.
엄마는 무척이나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지만 영순은 안다. 둘 모두 똑같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에게 책임이 있겠지만, 엄마가 은연 중에 영순의 성공으로 이모를 약올렸는지도 모른다.
이모는 엄마와 화해하지 않았고 서로 연락하지 않고 몇 달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돈을 빌려 달라고 하니 영순은 당황스러웠다.
1억 원.
큰돈이다.
남편은 이모가 그냥 이자나 기한 없이 영순의 돈을 사용하고 싶어서일 거라고 했다.
정말 돈이 급했다면 대출을 받았을테니...
이모와 신경전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못 받는다 생각하고 빌려드리기에는 큰돈이다.
여유가 허락하는 범위에서 못 받는다고 생각하고 일부만 빌려드리자니
이모는 어려운 형편도 아니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애매했다.
심난했다.
어린 시절 받은 빚을 더 갚아야 하나.
이모의 의도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며칠을 답도 없이 그냥 보냈다.
밤에 홀로 조용히 산책하다가 문득 복잡한 상태가 싫었다.
영순은 휴대폰을 꺼내 들고 문자를 보냈다.
“이모 죄송해요. 도움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그렇게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만일 돈을 빌려드렸다면
영순은 이모의 의도를 신경 쓰며 몇날 며칠을 고민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이모와 영순의 가족들 사이, 아니 영순과 사이에 보이지 않는 채권채무를 계산하며 아직도 괴로워했을 것이다. 채권이나 채무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가 이모의 어떤 의도도 고민이 되지 않을 때
기꺼이 이모의 부탁 또는 고민을 해결하고자 할 때
그때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런 때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아파트 주위 산책로를 걷는 영순의 걸음이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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